성취

1988년 3월 12일
미국 텍사스 댈러스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19장

무엇이 삶에서 성취를 가져다주는지에 대한 추측이 많다. 하지만 우리는 성취 자체가 무엇을 가져다주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성취를 가져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성취는 당신이 자신의 참마음인 앎과 관계를 맺을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때 당신은 내적으로 자신과 하나가 되고, 당신 주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방식으로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종종 성취를 최종 결과로 생각한다. 성취는 당신이 모든 것을 다 말하고 행한 후에 얻는 것이다. 이 점에서 성취는 당신이 아직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다. 왜냐하면 당신 삶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취가 단지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당신 삶에서 바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것은 완벽한 성취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완벽한 성취를 이룰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삶에서 이루게 될 성취는 훨씬 더 큰 성취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취는 당신에게 평화와 목적의식을 주고 결과를 낳게 하므로, 당신이 내면에서 점차 존중하게 될 경험이다

당신 삶은 끝나려면 아직 멀었으므로 최종 결과의 관점에서 성취를 생각하지 말라. 삶은 실제로 그 범위를 한정할 수 없으므로, 성취는 당신 자신이 경험한 것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제시된 개념들을 이용하여 진지하게 숙고해 보기를 우리는 권장한다. 비록 이 개념들이 당신에게 익숙할지라도, 당신이 이 개념들을 모두 안다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말은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강조하고 싶은 성취의 결과 중 하나는 감사이다.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성취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 당신은 세상에 있는 동안 내면의 평화와 큰 연합에 마음을 연다.

세상은 당신의 고향이 아니므로, 세상의 상황과 상관없이 당신은 성취할 수 있다. 당신은 이곳에 온 방문자이며, 당신이 방문자이므로, 당신에게는 이 삶의 고난을 극복하고 진정한 공헌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신에게는 당신이 주변에서 감지할 수 있는 고통과 혼란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 이렇게 극복할 때, 당신은 당신 고향에서 세상에 절실히 필요한 것을 가져온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당신이 고향에서 가져온 것과 더불어 보강을 가져오고, 이 성취가 현실적이고 가능하다는 기억을 가져온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것이다.

먼저 앎을 조금 이야기한 다음, 성취 그 자체에 대한 경험을 다루어 보겠다. 당신은 내면에 당신의 참마음인 앎을 지니고 있다. 앎은 이 삶에서 만들어진 마음이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환경이나 관계에서 앎을 얻지 않았으며, 앎은 당신 존재에 내재하여 있다. 앎은 당신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당신의 마음 뒤에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아래에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큰 마음이다. 앎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각하며, 그 방식은 꽤 명확하고, 당신의 의식적 마음과는 매우 다르다. 앎은 매우 조용하고 매우 강하다. 앎은 매우 고요하지만, 앎이 생각할 때는 그 생각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지성은 매우 강력하므로 점진적으로 이 지성에 접근해야 한다. 당신은 이 지성을 받아들여 신뢰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은 이 지성이 봉사하는 데 현명해지려면, 이 지성이 당신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야 한다. 이 지성의 힘은 매우 자애롭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이 지성은 당신 내면에 있으며, 당신이 개입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당신은 이 지성을 망칠 수는 없지만, 잘못 알 수는 있으며, 이 지성을 이용하지 않으면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지성은 슬기로우므로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이 지성은 슬기로우므로 앎이라고 하며, 신의 계획에서 당신 역할도 담고 있다. 계획에 대한 이 개념은 여기서 완전히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 개념에서 당신은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이며, 완전히 한 개인만은 아니며, 이 세상에서 관련 없이 고립된 채 살아가는, 우발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은 계획의 일부이다. 이 계획은 이해가 불가능하므로 당신이 완전히 이해해야 하는 계획이 아니다. 당신의 인지 범위나 인지 역량을 벗어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계획이 있다는 것, 당신이 계획의 일부라는 것, 그 계획에 포함된 것이 전적으로 자연스럽고 당신 내면에 내재하여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신 삶에 매우 현실적인 가능성을 제공한다.

앎은 슬기로우므로 매 순간 자생적으로 생각한다. 앎은 모든 것이 미리 설정된 컴퓨터 프로그램과는 다르다. 앎은 살아 있고, 지금 생각하며, 지금 응답한다. 앎은 당신의 안내자가 되기로 되어 있다. 우리가 내적 안내를 말할 때, 우리는 앎의 학생이 되는 이들에 관해 말한다. 당신이 앎을 경험하기 시작하면, 앎은 점점 더 커지게 될 것이고, 앎의 위대함은 당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항상 확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앎을 규정하거나 사고 체계에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앎은 그것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앎이 당신 마음 뒤에 있는 마음인 것처럼, 당신 앎 뒤에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이 신이다.

당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앎을 바라볼 수 있으며, 우리는 당신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앎을 이해할 수 있도록 몇 가지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하고자 한다. 사람들이 앎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심오한 직관이다. 심오한 직관은 보통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나 다른 극단적인 상황과 같은 매우 까다로운 상황에서 활성화된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은 누구나 더 안전하고 더 편안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어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려움에서 더 벗어날수록 앎에서 더 멀어진다. 왜 그러는가? 앎은 원래 어려워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의식적인 마음을 꿰뚫고 내면 깊은 곳에 도달하려면 보통 이런 상황들이 필요할 뿐이다. 그때 필요성이 있고, 당신은 어떤 것을 알아야 한다.

미래에는 당신이 앎에 다가가는 데 어려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의도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앎과 떨어져 있으므로, 당신은 앎에 도달하기 위해 앎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삶이 틀림없이 당신을 이 문턱에 이르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딜레마가 극단적으로 될 때까지 놓아둔다. 그들은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똑같은 해를 자신에게 끼치며, 더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똑같은 상황에 머문다. 이때 그들은 틀림없이 어떤 것을 알게 된다.

고통과 앎이 엄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앎은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앎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생각하지 않으며, 숙고하거나 선택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앎은 진정으로 신이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다. 당신은 비통한 상황이 더 적고, 보기에 더 멋지고, 행복한 때가 더 많은 더 멋진 세상을 신에게 요구할 수 있지만, 장담하건대 당신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앎이다. 당신의 딜레마는 앎과 함께 있다.

앎은 당신에게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다음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누구를 피해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앎은 판단도 비난도 하지 않고 이것을 알려준다. 앎은 신과의 권한 문제를 해결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이 당신을 이끄는,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임을 알지만, 당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이므로 개인적으로 당신일 수 없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삶에서 큰 권한을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다룬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자신이 아닌 더 큰 권한을 피하거나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더 큰 권한에 굴복한다. 이 둘 모두 매우 어리석다. 그래서 당신들 각자의 내면에는 이 딜레마를 조정하고, 신과의 이 주된 관계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한다. 당신들이 그 관계를 치유한다면, 서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이 딜레마에서 당신의 모든 죄책감과 불안이 생겨나며, 그 결과 당신이 보는 세상이 만들어진다.

앎은 본질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래서 삶의 특정 시기에 당신은 어떤 이를 만나고, 그때 알아보는 느낌이 있다. 이 느낌은 심오하며,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다. 이 알아보는 느낌을 주의 깊게 보면, 당신은 이것이 업보에 의한 것이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은 전생과 관련이 없다. 전생은 이에 비하면 매우 피상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계는 저승에서 맺어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당신은 이 사람과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성격과 당신의 성격이 잘 맞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큰 인지가 있다. 소개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당신들이 하고 싶은 것은 단지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알아보는 것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는가?”

당신의 많은 부분은 세상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당신의 일부는 세상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세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당신의 일부는 세상과 깊이 관련이 있는 당신의 일부를 인도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내면의 교사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곧잘 이야기했다. 이 부분을 다룬 가치 중 일부는 사람들이 권한과 관련된 자신의 문제를 인지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니야, 나에게는 어떤 교사도 필요하지 않아. 왜 나에게 교사가 필요한가? 내가 직접 신에게 갈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아, 교사!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내 삶을 살지 않을 것이며, 교사를 위해 내 삶을 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두 극단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그 중간 어딘가에 있다.

당신이 세상 마음인 개인적 마음으로 생각하면 진정한 교사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누군가는 항상 손해를 본다. 당신의 교사가 당신에게 선물을 가져다주므로, 교사가 경시되고 무시되면 당신에게 손해이고,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회복하여 그 능력으로 참 자아 의식을 회복하는 것이 교사의 목적이므로, 당신이 교사에게 굴복하면 교사와 당신 모두에게 손해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예상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내면의 교사들은 무대 뒤에서 일하며, 당신이 자신의 능력을 다시 경험하고 효과적으로 그 능력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공헌한다.

중요한 것은 앎이다. 당신들 각자에게는 자신이 처한 삶의 상황에서 앎을 발견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당신 앎은 지극히 지혜로우며, 심지어 세속적인 상태와 관련해서도 지혜롭다. 그래서 앎이 매우 효과적으로 일한다. 앎은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세상에서 진정으로 효과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앎은 두려움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앎은 다른 사람들의 앎을 활성화해서 그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고귀하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모든 지혜가 나에게 내재하여 있는데 왜 교사가 필요한가? 나는 모든 교사들을 건너뛰고 바로 신에게 가겠다. 교사는 귀찮은 존재이고 장애물이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해도 괜찮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교사들이 당신을 앎으로 입문시킨다는 사실의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교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지 당신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들은 당신이 그들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을 입문시킬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당신이 사는 이번 삶이 그 자체로 하나의 경험이면서, 그에 못지않게 저승의 삶을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 때문에 당신이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당신이 학습한 많은 경험이 이번 삶과 아무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경험들은 다가올 삶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놀라운 형이상학적 정당성과 해석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해도 된다. 당신 삶이 멀리 저승까지 뻗어 있으므로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준비시키고 있다. 세상은 고향으로 가는 여정의 중간 지점이다. 세상과 고향 사이에는 다양한 경험의 영역이 있다.

이제 성취를 이야기할 터인데, 우리는 비유를 하나 들어보겠다. 우리가 들고 싶은 비유는 환자를 수술하는 외과 의사에 관한 것이다. 당신은 외과 의사이고, 세상은 환자이다. 외과 의사가 환자를 수술할 때, 그 의사는 환자로 인해 고통받지 않는다. 외과 의사는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환자를 수술한다. 만약 외과 의사가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면, 미래도 결과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환자를 수술하며, 환자가 얼마나 심하게 아픈지를 논의하기 위해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환자의 병력이 그 순간 그들이 일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면 환자의 병력을 불필요하게 걱정하지 않는다. 환자의 병력과 미래는 중요하지 않으며, 당면한 수술만 중요할 뿐이다.

이 비유가 유용한 이유는 환자가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외과 의사는 그 환자를 수술하면서 성취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당신이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에서 일하는 동안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외과 의사는 환자가 고통받고 있고 그러니 당연히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점에서 불만이 없다. 그 외과 의사는 단순히 환자를 수술할 뿐이다.

당신의 성취는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와 관련이 있으므로, 당신 일과 관련이 있다. 당신은 휴가를 보내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휴가를 가기에 더 좋은 곳들이 있다. 당신은 또한 자신에게 공을 들이려고 세상에 온 것도 아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공을 들일 수 있겠는가? 당신은 자신의 성격에만 접근할 수 있으며, 이것은 성격이므로 그다지 많은 일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당연히 당신은 자신의 앎에 공을 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에게 공을 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당신의 인식, 행동, 태도, 표현을 조정하는 것이 전부이다.

외과 의사의 또 다른 매우 중요한 특징은 외과 의사가 자신을 수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과 의사는 환자를 수술한다. 외과 의사를 유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환자에게 온통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가 한 준비이다. 만약 외과 의사가 다른 생각을 하면, 실수할 수 있다. 성취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마음을 한곳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다. 외과 의사는 당면한 임무에 집중한다. 외과 의사에게 당면한 임무는 행복이나 슬픔, 천국이나 지옥의 문제가 아니다. 신이 세상에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런 집중이다.

외과 의사는 왜 그렇게 효과를 내는가? 왜냐하면 외과 의사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세상에서 힘을 갖는 것이다. 당신 마음이 확대되지 않으면 않을수록, 마음은 힘이 점점 더 약해지며, 상황에 마음이 더 많이 휘둘릴수록, 마음은 상황에 영향을 더 적게 미친다. 선을 위해서든 악을 위해서든 누구나 집중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왜 그러는가? 집중하면 자기 내면에 있는 갈등을 다루지 않으므로 마음은 더 강력해지기 때문이다. 당신의 노력은 더 한결같고 더 관리되고 있으므로, 접근에 집중하지 않는 약한 마음을 가진 이들에게 당신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이 다른 이들의 영향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 앎은 다른 이의 성격에 영향을 받을 수 없지만, 당신 마음은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접근할 때 당신이 접근하는 것보다 더 집중하면, 그 사람은 당신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겁을 주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단지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앎과 함께 있으면,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앎은 어떤 개인의 성격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강력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참된 성장의 첫째 목표는 당신의 삶을 단순화하고 통합하는 것이며, 당신 삶에서 통합 요소는 앎이다. 왜냐하면 앎의 목적과 사고는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앎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고, 선택 사이에서 고심하지도 않는다. 앎은 상황을 논의하지 않는다. 앎은 상황을 추론하지도 유도하지도 않으며, 행동할 때가 되면 행동한다. 앎은 아주 매우 깊은 영적 본능과 같다. 그러나 앎은 요청한다고 해서 당신에게 오지 않는다.

이제 당신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 등 자신을 관찰하고, 이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면,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과 자신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훨씬 더 큰 관점을 얻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당신은 앎을 경험할 때,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당신 주변의 것들은 깊이 알아차린다. 이것은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은 자신을 더 잘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당신은 항상 자신을 점점 더 잘 알아차릴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신비로우며, 말로는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앎을 경험할 때는, 당신은 마치 환자를 관찰하는 외과 의사와 같다. 당신은 그 상황에 완전히 현존한다. 당신은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관찰자는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 당신은 당신 자신이다. 이것이 성취이다.

당신은 어떻게 앎에 도달하는가? 당신은 앎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는가? 먼저 순수해지고 두려움이나 분노 없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생각해야 하지 않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렇지만 앎을 선택하는 것은 의식적인 선택이며, 쉽게 잊어버리는 시작 단계들과 매우 기본적인 전제들이 어느 정도 필요하므로 이것들을 지속적으로 보강해야 한다.

앎이 무엇인지, 앎이 무엇을 할 것인지 당신이 모르더라도 당신 내면에는 앎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의 삶에서 신비를 허용해야 한다는 뜻이며, 이 신비는 훌륭하고 의미 있으므로 경외심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이 자신을 비난하는 일 없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너무 많은 것을 안다고 가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학생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당신이 아는 것들을 존중하고 주장해야 하며, 또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당신은 자신의 관점을 수정하는 데 마음을 열지만, 앎에 대한 당신의 주장에는 매우 확신한다.

앎은 그 역량을 당신에게 입증하겠지만, 먼저 당신은 앎을 따라야 한다. 앎은 이전에 당신 생명을 구했고, 아마 이것이 우리가 앎을 말할 때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경험일 것이다. 다가오는 차량을 피해 핸들을 돌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신 마음을 누르고 당신의 진로를 극적이고 유익하게 바꾼 것이 바로 당신의 그 부분이다. 바로 당신의 그 부분이 “나는 이 관계에 헌신할 수 없다.”라고 말하며, 이 결정으로 당신은 수치심과 불안을 느꼈지만, 그 결정이 나중에 당신을 구했다.

앎이 당신 내면에서 출현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삶에서 엄청난 영적 현존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당신 내면은 물론 당신 주변까지 당신 삶에 현존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고, 그 현존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더라도 온갖 불확실성에 직면하여 당신에게 용기를 줄 정도로 변함없고 확고하다. 당신의 친구들은 “당신은 변했다.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나는 모르겠는데.”라고 답할 것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매우 깊이 느끼기 시작하고, 더 나빠지게 하는 것들을 피하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함께할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경험들을 선택하고 기존의 것들을 제쳐 둘 것이다.

앎에는 성취해야 할 목적이 있지만, 아직 그 결실을 보지 못했으므로 당신은 이 목적을 규정할 수 없다. 이 목적은 당신에게 목적 자체를 보여주어야 한다. 신의 현실은 이런 식으로 당신에게 입증되며, 당신은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가치를 찾는다. 수술하는 외과 의사처럼, 당신은 자신이나 세상을 걱정하는 일 없이 세상에 공헌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신이 온 목적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세상을 걱정하게 되면 당신은 겁을 먹고 화가 날 것이며, 이 두려움과 분노는 언제든지 당신을 압도할 수 있다.

외과 의사의 비유가 유용한 이유는 외과 의사들이 자신의 한계를 깊이 인식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누구도 치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술적인 일을 수행한다. 치유가 있다면, 그들의 노력과 함께 일어난다. 그들은 자신이 주요 참여자인 더 큰 사건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의 가르침은 매우 현실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너무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진짜 책임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아는 것을 따르기 시작하면 당신 삶에는 많은 신비가 있을 것이다. 당신이 아는 것이 당신을 다른 사람과 의미 있게 결합하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삶을 결합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되어 있으므로,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이다. 당신의 공동체는 학생들의 그룹일 수 있고, 결혼일 수도 있으며, 사업체일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을 내주기로 한 곳에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왜 이전에 자신을 내주지 않았는지 이해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당신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지 때와 장소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앎은 매우 신비롭다. 사람들은 거기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은 포착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들은 그것을 붙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행복은 어떤 것인가?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그 순간의 행복인데, 이것은 재미있게 논 결과이고, 드물게는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인지한 결과이다. 다른 하나는 지속되는 특성을 지닌 행복으로, 이것은 당신 삶이 진정으로 결합하여 있다는 만족감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아마도 화려한 행복은 아닐 것이다. 당신은 하루 종일 웃으면서 다니지는 않지만, 이 행복은 당신과 함께 있다. 당신이나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은 자신의 자리를 찾았고, 자신의 길을 찾았으며, 자신의 길이 자신을 이끌 것이라는 매우 큰 확신이 있다.

외과 의사처럼, 당신은 이제 지도자도 아니고 추종자도 아니다. 당신은 둘 다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자신의 감각을 이끌지만, 여전히 매우 큰 어떤 것의 인도를 받는다. 당신 내면의 교사들은 당신이 이것을 준비하도록 돕기 위해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본질적인 관계를 나타내며, 당신이 온 곳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승에 있는 당신 삶의 증거이다. 그들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한 교사는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사실, 모든 교사는 다양한 성장 단계에 있으므로, 완벽한 교사는 가설이다. 그러므로 교사들에게는 교사들이 있고, 계속해서 그 교사들에게는 또 교사들이 있다.

그러므로 완벽한 교사에 대해 관심을 두지 말라. 그것은 완벽한 사람과 같은 것이다. 완벽한 사람은 단지 상상 속에 있을 뿐이다. 당신이 필요하고 당신의 경험과 능력에서 혜택을 볼 수 있는 이들에게는 당신이 교사이며, 당신에게도 교사들이 있다. 이런 식으로 모든 사람이 진보한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말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온 곳에서 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배웠으며, 이 세상에 매우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 길을 여행한 적이 없는 이들은 당신의 교사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의 경험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신은 관계에 대한 이 감각이 있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자신을 내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이 지구에서 산 적이 전혀 없는 교사들도 있지만, 당신과 함께 있는 교사들은 당신의 영적 가족에서 왔고, 그들은 이 지구나 다른 행성에서 이와 비슷한 길을 여행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신이 저승에서 이승으로 넘어와 당신 삶을 적용하려는 데 겪는 어려움을 이해한다.

이제 “내가 어떻게 세상에 있으면서 앎을 기를 수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세상을 바꾸면서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당신이 참된 능력을 갖추고 세상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있으며, 당신은 이것을 미리 결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을 움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당신은 더 큰 확신과 힘을 가지고 세상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당신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만약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매우 혼란스럽고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이 좌절감을 자신의 상황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당신이 자신의 참 자아와 관계를 맺지 않은 것, 이것이 당신을 화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일이 당신 뜻대로 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것을 알 때, 당신은 자신의 노력이 진정으로 효과적일 수 있는 곳에서 노력을 확장하기 시작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아무리 자신의 외적인 일의 균형을 맞추거나 조화를 이루더라도, 이 갈망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갈망을 직접적으로 다루면, 이것은 당신 일의 균형을 맞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먼저 찾아야 하는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