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두려움

1988년 8월 19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29장

이제 나는 당신들 중 대다수가 큰 발걸음을 내딛기 직전에 있으므로 이것과 특별히 관련이 있는, 믿음과 두려움을 말하겠다. 당신에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기회이다. 사실, 그 변화는 저승에서 당신을 지켜보는 이들이 오랫동안 고대한 기회이다. 진정한 변화는 사람들에게 깊이 영향을 미치므로 사람들은 진정한 변화에 매우 강하게 맞선다. 진정한 변화는 단순히 그들이 새로운 상황에 처하거나, 기존 활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에 참여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면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어떤 것과 접촉한다.

개인 내면에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려면 특별한 상황이 필요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안정되게 혹은 변함없이 유지하려고 하면,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기가 더 어렵다.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상황을 더 통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아를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삶은 당신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 왔다.

그러므로 당신이 개인적인 일들을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큰 문을 열어 두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말했듯이, 중요한 변화는 당신에게 매우 깊이 영향을 미칠 것이고, 당신 자신에 대한 경험을 바꿀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경험이 바뀐 그 특별한 순간을 기억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 변화는 정말 중요한 것이다. 사람들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고, 새로운 관계 등을 맺지만, 어떤 것도 그들에게 깊이 와닿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을 새롭게 경험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어떤 것도 아직 그들에게 깊이 와닿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일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가 믿음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일반적인 의미로 당신에게는 삶은 좋고, 신은 저 밖 어딘가에, 너무 가까이는 아니지만 저 밖 어딘가에 있다는 믿음이 있다. 당신에게 신이 필요하면 신은 분명히 거기에 있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신은 당신의 계획에 어떤 간섭을 할 정도는 아니다. 일종의 편리한 신이다. 마치 생명 보험 증서와 같다.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경우,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어떤 이가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자신에게 믿음이 있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은 통상적인 의미일 뿐이다. 나는 더 깊은 의미, 진정한 의미에서 믿음을 말하겠다. 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신, 큰 힘, 삶 등 당신이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것을 믿고 그래서 모든 것이 잘 풀리면, 그것은 좋은 일이므로 당신은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당신의 믿음은 조금 흔들릴지도 모른다. 이제 믿음을 갖기가 더 어렵고, 다시 한번 당신의 믿음을 굳건히 하려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신 내면 매우 깊은 곳에서 언젠가 일어날 접촉이 일어나면, 그때는 완전히 새로운 믿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것을 조금 설명하고자 한다.

세상에서 인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온갖 역경에 맞서 방어할 것인, 자신의 생존 본능의 원천은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육신의 보존인가? 일반적인 의미에서 당신은 그렇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자기방어에 대한 근본적인 동기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이 거의 생각하지 못할 어떤 것이며, 심지어 의식하는 부분조차 아닐 만큼 매우 근본적인 어떤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여기는 자아 관념이 바뀌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자아 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육체적으로 자살하는 것은 꽤 분명하다. 사람들은 자신이라고 여기는 자아 관념을 전적으로 보호한다. 왜냐하면 그 관념이 세상에서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때 자아 관념이 영향을 받는다.

이 자아 관념은 당신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최소화하거나 없애고 긍정적인 측면을 향상시키려는 당신 소망을 훨씬 뛰어넘는다. 당신 소망은 여전히 표면 마음에 있다. 그렇지만 당신의 근본 자아 관념이 영향을 받을 때, 당신의 삶은 진정으로 변한다. 그것이 진정한 변화이고, 중요한 변화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장 깊이 갈망하고 동시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것이다. 당신의 모든 습관과 충동이 당신의 자아 관념을 유지한다. 나는 “자아 관념”이라는 이 표현을 사용하여, 당신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이 당신 자신이라고 여기는 자아 관념, 이 매우 연약한 것을 바꾸는 것임을 당신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당신이 진정한 변화, 진정한 발전, 진정한 진보를 경험할 때, 자아 관념은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그리고 자아 관념이 변하는 동안,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시기를 겪으며,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태처럼 보인다. 바로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때이다. 바로 이때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이때 새로운 방향을 인식하고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다. 바로 이곳으로 당신을 데려오는 것이 이 모든 발전과 개인적 성장의 목적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 변화를 겪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나 당신 자신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발전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뜻이며, 미지의 세계는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지 그다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이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간단하게 들린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많은 두려움이 있는가? 두려움이 대단히 많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자신이 대부분 두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각하지 않은 두려움에 빠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패닉과 같은 심각한 두려움에도 빠져 있다. 이것은 불필요하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앎을 발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 삶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당신의 자아 관념 너머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정말로 앎을 찾으려면 자아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앎은 단순히 직관적인 경험을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큰 자아의 현실로 당신을 이끈다.

여기서 당신은 자기 내면에 가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도움을 받고 저승에서도 도움을 받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도움이 당신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당신은 안내와 도움 없이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 관념은 통합된 정체성을 나타내는 우주에서 분리된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이런 식으로 당신은 개인적으로 당신 자신이라고 여기는 당신 관념을 유지한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함께 관계를 맺으면 “나는 내 개체성을 얼마나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협상이 있으며, 각자의 개체성을 표현하고 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인다.

사람들은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이나 곤란한 상황을 왜 두려워하는가? 이것은 모두 자아 관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혼자 있을 때, 당신에게 있는 것은 당신의 자아 관념뿐이다. 당신에게는 아직 참 자아가 없다. 앎을 따르면 당신은 바로 참 자아로 돌아간다. 여기서 당신은 당신의 자아 관념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는 시기를 거쳐야 한다. 여기서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훨씬 더 큰 믿음이며, 당신이 돈을 잃거나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려고 저 밖에 어떤 좋은 것이 있기를 단순히 바라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내면에 있는 앎의 힘을 발견하기 시작하면, 당신은 모든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도 알 것이다. 당신은 자기 내면에서 이것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항상 당신 길을 막고 당신에게 돌아가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으로 돌아가라. 익숙한 것으로 돌아가라.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뒤로 물러서라. 가진 것을 지키라. 위험을 무릅쓰지 말라.”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하기 위해 밖에 나가서 자신이 가진 것을 걸고 하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터무니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삶에서 진정한 변화가 당신에게 일어나면, 당신이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변화는 매일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삶에는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시점이 있다. 이 시점은 큰 기회이다.

이 변화는 당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변화는 당신 자신의 더 깊은 뜻과 모든 삶의 더 큰 뜻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다시 말해, 진실의 결과이다. 개인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아무도 진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단지 부분적이고 아마 순간적인 이해만 있을 뿐이다. 당신 내면에는 이 변화를 가져오는 더 큰 어떤 것이 있다. 당신은 응답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응답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당신에게 응답할 것이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는 어떤 것에 불을 붙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 진정으로 앎을 경험하고 앎을 향한 각각의 계단을 따르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식으로 동기를 부여받기 시작할 것이다. 여기서 당신은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이 점이 중요하다.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본다면, 당신은 자아 관념을 전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각이나 행동이 일관되지 않기 때문이다. 신뢰할 가치가 있는 것은 일관되어야 한다. 그리고 강해야 하고, 선해야 하고, 항상 그곳에 있어야 한다.

삶에서 이 자격이 있는 것은 단 둘뿐이다. 하나는 신의 일부이자 당신의 일부인 앎이다. 다른 하나는 신이다. 신을 우주에 있는 모든 앎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그렇게 말해도 된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라는 말을 하면 어린 시절의 기억 등을 떠올리며 좋아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신을 말한다.

그러므로 당신에게 가치가 있는 믿음은 오직 이 둘이다. 당신이 앎을 믿으면, 당신 자신의 가치가 회복된다. 당신이 앎을 따를 수 있으면, 앎은 당신에게 앎의 현실을 보여줄 것이다. 당신이 앎을 따를 때만 앎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신을 믿으면 삶과 당신의 관계, 우주와 당신의 관계가 회복된다. 그래서 당신에게는 자신이 회복해야 하는 신의 일부분이 내면에 있고, 자신이 회복해야 하는 삶과의 관계가 있다. 여기서 당신은 진정한 행복을 위한 기반을 쌓기 시작한다. 이때 당신의 삶은 이치에 맞으며, 당신은 자신이 왜 지금과 같은 사람인지 깨닫는다. 당신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어떤 것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당신은 항상 다른 사람들을 닮으려고 하고, 이것에 대해 화를 낸다. 그리고 당신이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치며, 이것은 많은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 주위에서 결코 편안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갈등을 일으키며, 관계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든다.

당신은 앎을 한꺼번에 발견하지 못한다. 앎은 점진적으로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 각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앎이 당신의 자아 관념을 천천히 바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큰 경험을 한다. 이 경험들을 통해 자아 관념에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나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일종의 탈바꿈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아의 작은 변화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아마도 상황을 조금 다르게 경험하기 시작할 수 있지만, 그것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다. 왜냐하면 본연의 당신은 자아 관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연의 당신은 자아 관념을 이용할 뿐이지만, 이것을 보고 이것이 사실인지 알려면 자아 관념을 넘어서야 한다.

왜 내가 당신과 함께 여기 있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세상에서 자신을 회복하려고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성취의 길이 아니다. 당신은 훌륭하고 완벽하고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한 자신의 모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엇을 하기보다는 한 것을 되돌리는 것에 더 가깝고, 취하기보다는 내려놓는 것에 더 가깝다. 자신을 더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삶에서 진정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는 자아 관념을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임시 방편일 뿐이다. 왜냐하면 나를 경험하려면 당신은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나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단지 당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이상한 존재,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이상한 존재일 뿐이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으며, 모두 표면에만 있다. 진정한 경험이 드러나는 당신 내면 깊은 곳에는 진정한 관계가 있다. 이것은 당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당신들은 오랫동안 친밀하게 함께했는데, 아직 서로 접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즉 관계를 이해하는 것 넘어, 행동과 공유된 관심사를 뛰어넘어, 매우 깊이 실제로 접촉하거나 관계를 실제로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좋은 것이 모두 어디 있는지를 말하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단지 자극일 뿐이며, 불안감을 떨쳐버리도록 잠깐동안 당신 주의를 끄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나쁘지 않으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뿐이다. 각자의 내면에는 앎의 참된 표현이 있다. 우리가 함께 여기 있는 목적은 바로 다른 모든 생각, 영향, 경향 속에서 앎의 참된 표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오직 앎과 신만 믿을 수 있다. 앎은 당신 내면에 있는 신이다. 신은 우주에 있는 앎이다. 왜 두려워하는가?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면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두에게 알려주려고 이렇게 한다! 모두가 내 자아 관념을 기억하게 하려고 이렇게 한다.”라고 말한다. 만약 자아 관념이 너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는데 당신에게 앎이 없다면, 미칠 수 있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의 자아 관념이 너무 작아 당신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큰 경험에 마음을 열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는 참된 지원과 도움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참 자아를 찾기 위해 자신의 자아 관념의 빛을 가리면, 때때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람들이 혼자서 참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 것을 말렸다. 당신 혼자서는 참 자아를 찾을 수 없다. 참 자아를 찾는 일은 당신 능력을 넘어선다. 참 자아를 찾으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참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내가 신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앎을 믿는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있는 앎은 세상에서 신의 가장 참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위대함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내가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것은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찾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가진 것에 정말로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계속 지닐 수 있다. 그것은 괜찮다. 만약 관심이 없다면, 그것도 괜찮다. 모두 다 괜찮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궁핍으로 이끌지 않을 것임을 알려면, 자신의 참 자아를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그들이 맡아야 할 아주 큰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세상에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큰 역할이 있는 경우에는 일시적으로 어떤 것들이 필요하며, 그것들은 모두 더 큰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 음악가가 되는 것? 더 큰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운동선수가 되는 것? 더 큰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들의 리더가 되는 것? 더 큰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 경험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앎의 학생이 정확하게 배워야 하는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두려움을 분별하여 두려워하는 때를 알고, “오, 나는 두려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그 순간 당신의 부담이 절반은 사라진다. 사람들은 두려우면 그것이 다른 어떤 것 때문, 즉 다른 사람 때문이거나 어떤 것이 진행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단지 두려워할 뿐이다. 당신이 두려울 때, 당신은 앎과 함께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미친듯이 행동하면, 당신은 대응할 수 없다. 당신이 닫혀 있으면 아무도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나는 당신이 분명히 어떤 것에 매우 겁을 먹었을 때 느끼는 두려움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평상시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어떤 것이 당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려주려는 것뿐이다.

내가 당신에게 저승의 중요한 비밀을 하나 알려주겠다. 신은 당신이 “멋진 사람”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신은 당신이 좋아 보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하지 않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만 있을 뿐이다. 만약 당신이 진실하고 멋져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면, 당신은 멋져 보일 것이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삶에는 단 두 가지만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만든다. 나는 단 두 문장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다. “삶에는 두 가지밖에 없다. 앎이 있고, 좋아 보이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좋아 보인다! 왜 좋아 보이게 하는가? 자아 관념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내가 농담한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날 당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당신의 기분이 어떤지 보라. 당신은 두려워할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처럼 옷을 입고 나가보라. 당신은 두려워할 것이다. 당신이 꼭 이렇게 할 필요는 없지만, 당신들 중 일부는 매우 모험심이 강하고 모든 것을 시도해 보고 싶어 한다.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시도하면서 일생을 바치는데, 이 시대에는 세상이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매우 신나는 곳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면 당신은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이 다 똑같다는 것을 깨닫고, 앎을 염원하는 소망만 남는다.

당신은 밖에 나가 자신의 차에 가서 문을 열고 앎을 경험할 수 있다. 가장 평범한 행동이다. 이 평범한 행동이 세계 곳곳에 있는 피라미드에 가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을 수도 있다. 왜 그러는지 아는가? 피라미드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피라미드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은 피라미드가 세워질 때 경험한 앎뿐이다. 그것 말고는, 피라미드는 단지 흥미로운 모양을 한 “물건”일 뿐이다. 거룩하거나 신성시되는 모든 장소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의 유일한 가치는 그곳에서 경험된 앎이다. 그래서 당신이 그런 장소에 가면 경험된 앎이 그곳에 남아 있다. 왜냐하면 앎이 경험된 곳은 어디든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욕조에서 앎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욕조는 거대한 대성당만큼이나 신성한 성소가 된다. 사람들은 종종 가장 평범한 상황에서 앎을 경험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어떤 것이 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멋진 순간이다! 하지만 그런 다음에는 틀림없이 그들은 다시 자아 관념을 보호할 것이다.

두려움에는 두 종류가 있다. 나는 여기서 이 둘을 구별하고자 한다. 하나는 자아 생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두려움인데, 이것이 당신이 경험하는 두려움의 약 99%를 차지한다. 그리고 또 다른 두려움이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 전혀 두려움이 아니다. 이것은 산악 등반하는 것과 같은 신중한 관찰에 더 가깝다. 두려움이 아니라, 신중한 관찰이다. 당신은 이제 매우 주의를 기울인다. 당신은 신중하다. 그것은 훌륭하다. 정말로 신중하려면, 당신은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해야 한다. 관찰하고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심오한 상태이다. 이것은 매우 드물다.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 매우 적으므로, 그런 사람이 삶에서 성공하기는 매우 쉽다.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당신이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당신은 어떤 것을 정의하거나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주변의 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한다. 만약 살얼음이 얼고 물살이 센 강을 건너려고 한다면, 당신은 그 강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어디에 발을 디뎌야 할지 알기 위해 강을 지켜볼 것이다. 이것이 매우 빈틈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상태이다. 신중함이 그런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나머지 두려움은 점점 더 불필요해질 것이고, 당신이 당신 내면이나 너머에 있는 앎을 신뢰하기 시작하면 단지 마음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이것은 특히 당신이 삶에서 진정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면, 관련이 있는 주제이다. 앎이 기반이다. 앎은 당신의 여정을 훨씬 더 쉽게 해줄 것이며, 당신은 변화에서 진정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가치를 얻지 않으면, 당신이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거나 당신 상황이 바뀌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모든 것은 잊혀진다. 당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져가는 것은 여기서 발견한 앎과 진정으로 맺은 관계뿐이다. 그것들은 영속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판별을 적게 할수록 당신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판별은 분명 매우 중요한 판별일 것이며, 열린 마음이 대단히 필요할 것이다.

이제 나는 봉사에 대해 조금 말하고자 한다. 당신 삶이 더 큰 어떤 것에 봉사하는 것임을 당신이 경험할수록 당신은 두려움이 줄어들 것이다. 당신 삶은 더 큰 어떤 것을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당신 삶은 더 큰 어떤 것에 봉사하는 것이다. 당신이 봉사하면 잃을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 항상 실패와 손실의 위험이 크다. 당신이 이미 여기서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고, 얻으려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이 말은 당신이 어떤 것을 획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당신이 어떤 것에 봉사할 때, 당신은 이미 내재한 관계를 인정하고 그 관계에서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완전한 봉사의 상태에 이르는 것은 주고받는 심오한 상태이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거의 없다. 당신에게는 여전히 자아 관념이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참된 본성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용할 수 있는 개별적인 본성이 있고, 영속적인 참된 본성도 있다. 당신의 영속적인 본성을 논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 본성은 당신이 하는 다른 일이 없을 때 그냥 거기에 존재한다. 하지만 당신의 개별적인 본성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의 기반이 여기에서 구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에게 매우 흥미롭고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하겠다. 사람들은 고요히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결연한 의지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두 경험은 매우 상호 보완적이다. 고요를 배울 때, 당신은 결연한 의지로 행동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결연한 의지를 자극하는 것을 기다리는 법도 배운다. 그러니 당신이 혼란스럽고 의심스러울 때, 고요히 있으라. 당신은 여전히 묻고 있어서는 안 된다. “답은 어디에 있지? 나는 고요히 있다. 답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고요히 있다. 나는 5분 동안 고요히 있었다!” 이처럼 의문을 품는 마음에는 답이 없다.

삶에 있는 신은 당신이 따를 수 없으며, 당신이 따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면이나 다른 사람 내면에 있는 앎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의 좋은 예가 되는 사람들과 함께하라. 당신이 삶에서 해야 할 중요한 것을 알고 싶으면, 중요한 것을 하고 있는 사람과 함께하라. 당신처럼 혼란스러운 사람들과 함께하지 말라. 당신들은 서로의 혼란을 증폭시킬 것이고, 모든 것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놓고 끝없이 토론할 것이다. 그리하기보다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과 시간을 보내라. 이것은 복잡하지 않다.

앎은 이 세상에서 두 가지를 통해 표현된다. 하나는 고요함이고, 또 하나는 단호한 행동이다. 바로 이 두 곳에서 사람들은 앎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를 알기 위해 고요히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무언가를 알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한다. 하지만 당신들은 모두 다소 고요히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첫째 단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