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믿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


2008년 6월 28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었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The Great Waves of Change
제4편 > 변화의 큰물결 > 제11장

체험에 기반을 두었다면, 믿음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체험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면, 믿음은 단순히 희망일 뿐이다. 그리고 희망만으로는 빈약하여, 실망과 불확실성을 충분히 직시할 힘이 없다.

신을 믿는 것은 자신이 기대하는 것에 따라 달라진다. 신에게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신에게 무엇을 기꺼이 바치려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비록 믿음 그 자체가 다양한 체험을 포함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가치는 믿는 동기가 무엇이냐, 무엇을 예상하느냐, 신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은 자신의 어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므로 신에게 매우 실망한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거나 실망과 실패를 겪었다. 그들은 비극을 경험했다. 그래서 이제 신이 존재한다는 개념이나 믿음이 흔들리며, 때로는 완전히 깨지기까지 한다.

믿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믿음을 가질 것이다. 그래서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신을 대신해서 다른 무엇인가를 믿을 것이다. 정부를 믿을 수도 있고, 경제체제를 믿을 수도 있으며, 산업구조를 믿을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을 믿을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사람을 믿을 수도 있으며, 자연을 믿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엇이 됐든, 믿음을 가질 것이다. 믿음 없이 산다는 것은 관계를 맺지 않고 사는 것이며, 관계를 맺지 않고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을 믿느냐, 또 그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가 된다. 믿음이 진짜 체험에 기반을 두었는가? 아니면 관념이나 철학에 기반을 두었는가? 이 믿음을 바른 곳에 두었는가? 이 믿음에 실질적인 힘이 있는가?

세상에 다가오는 변화의 큰물결 앞에서 믿음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해진다. 변화의 큰물결은 사람들이 자신이나 국가를 믿는 것에 도전할 것이고, 자연 그 자체나 신을 믿는 것에 도전할 것이다. 이 믿음이 얼마나 강하며 어디에 놓여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 변하는 환경 앞에서 단순히 제대로 기능하는 일뿐만 아니라, 분별력을 가지고 창의적이고 유능하게 능력을 발휘하느냐가 결정된다.

정부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부가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정부는 대립 상태에 있거나, 어떤 경우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보일 것이다. 사태에 대처할 수도 없고, 사람들을 교육하거나 이끌 수도 없어 보일 것이다. 실제로 이런 상황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어떤 정부가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겠는가? 에너지 자원의 실제 상황, 기후변화와 온난화의 실질적 잠재력, 유행병의 위험성, 남은 자원을 서로 차지하려는 경쟁의 격화, 경제가 불안정해질 실제 가능성, 현재 경제 상황 등 변화의 큰물결을 몰고 올 이런 것들을 어떤 정부가 그대로 알려주겠는가?

자신의 종교를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종교는 그들을 교육하거나 준비시킬 수 없을 것이며, 그들에게 주의를 올바르게 기울이도록 이끌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을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연은 준비하지 않은 자에게는 혹독하고 냉혹하며 심지어 무자비하기까지 할 것이다.

또 신을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은 신이 어떻게 이런 큰 변화가 일어나도록 놓아두었을까 하고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하늘의 섭리는 어디 간 것인가? 신은 도움의 손길을 언제 보내주는가? 은총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더욱 어려운 시기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매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다. 비극이 있을 것이고, 굶주림이 있을 것이며, 투쟁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외칠 것이다. “자애로운 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일어나도록 했단 말인가? 신은 인류가 잘못한 것을 벌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인류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도록 놓아두는 것인가? 특히 이런 비극과 궁핍에 직면하여 자애로운 창조주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해 대비하지 못한 상황을 맞이함으로써 엄청나게 도전받을 것이다. 이 상황이 부자들에게 특히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이제 매우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들 재산의 대부분을 잃을 가능성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삶 자체를 믿는 사람들은 어찌될 것인가? 삶은 이제 급격히 변할 것이며, 마치 혼돈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변화는 가속화되고, 어려움은 계속 커져만 갈 것이다. 미래를 예견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지고 많은 곳이 대단히 위험할 때, 삶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믿음은 크게 도전받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신이 당신 내면에 심어놓은 힘에 믿음을 두어야 하며, 실은 항상 두었어야 했다. 당신은 당신을 인도하는 힘, 즉 앎의 현존과 힘이자 당신을 안내하고 보호하는 깊은 지성, 당신이 기꺼이 따르려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공헌하는 큰 삶으로 당신을 이끄는 깊은 지성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앎은 발견되지도 표현되지도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앎이 실제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마음을 앎이라고 생각하지만, 매우 복잡하고 풀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여 누가 자신의 지성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성은 이때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이성은 남을 탓하거나 불평할 것이고, 현실을 부정할 것이다. 이성이 현실을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면, 이성은 기겁할지도 모른다. 이성 그 자체만으로는 변화의 큰물결에서 오는 힘과 결과를 처리할 수 없다. 앎은 미지의 것이고 인식되지 않은 채로 있다. 사람들은 앎이 발현된 어떤 것을 보고 직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앎은 직관보다 큰 것이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당신은 무엇에 믿음을 둘 것인가? 정부나 금융기관에 둘 것인가? 유통시장이나 종교단체에 둘 것인가? 당신은 자연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이성을 믿을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믿을 것인가? 당신이 믿는 그 사람들은 인류 전체가 겪게 되는 변하는 환경에서 어쩌면 더 혼란에 빠질지도 모른다. 당신은 변화를 믿을 것인가? 모든 것은 변할 것이다. 삶은 변할 것이다. 아니면, 깨달음을 믿을 것인가? 그래서 당신이 사랑과 두려움, 희망과 절망이라는 이원성의 망령에서 벗어나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을 것인가? 이런 깨달음은 성취하기가 매우 어려우며, 좀처럼 성취하지 못한다. 아니면, 영성의 길을 믿을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이 걷는 영성의 길은 그들에게 변화의 큰물결에 대비하도록 해주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무엇에 믿음을 둘 것인가? 당신은 변화의 큰물결이 실제로 덮치기도 전에 더욱더 무력하고 절망에 빠져 이미 믿음을 잃었는가?

어떤 사람은 절망을 믿는다. 그들이 믿는 것은 절망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로맨스를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마치 영화처럼 현실과는 동떨어져 로맨틱한 환상의 세계에서 산다.

여기서 진정한 도전은 앎에 믿음을 두는 것,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이다. 그리고 앎이 무엇인지 배우는 것이다. 즉, 앎을 체험해보는 것이고, 이미 체험한 것들을 상기해보는 것이다. 또한 기쁠 때나 어려울 때를 통해서, 또 변하는 상황과 변하는 관계를 통해서, 앎은 당신 삶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기임을 보는 것이다. 성공한 때나 실패한 때 모두를 통해, 이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줄기, 끊임없이 이어지는 현존, 당신 이성의 영역 밖에 있는 불변의 지성인 앎의 줄기가 있다.

신은 이처럼 완벽하게 안내하는 지성을 당신 내면에 심어놓았다. 궁극적으로 당신 내면과 다른 사람들 내면에 있는 앎에 믿음을 두는 일 말고, 당신이 달리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앎은 변하는 환경에 구속받지 않는다. 앎은 이성에 있는 오류가 없으며, 죽음이나 파멸에 위협받지 않는다. 앎은 즐거움이나 사람, 장소, 사물에 집착하지 않으며, 부의 축적이나 부의 상실에 개의치 않는다. 앎은 신에게서 받은 사명을 띠고 이곳에 있다. 그 사명이 바로 당신 사명이며, 발견되기만 기다리고 있다.

당신 주변 모든 것이 도전받을 것이다. 당신 주변 모든 것이 나약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고, 틀리기 쉽고 취약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공공 기관이나 단체들은 상황에 압도되어 혼란에 빠질 것이고, 심하면 불능 상태가 될 것이다. 자연은 무자비해 보이고, 조금도 양보할 기미가 없어 보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늘이 도울 것이라는 희망, 구조되리라는 희망은 사라질 것이다. 이때 아주 많은 사람이 믿음에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당신은 이 시기에 살면서 이 상황을 맞이하여 공헌하도록 세상에 파견되었다. 그 공헌은 독특하고 중요한 어떤 일로써 당신 내면의 앎만이 알고 있다.

이성의 관점에서는 변화의 큰물결이 비극이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 당신의 생각으로 바라볼 때는 변화의 큰물결이 비극이다. 그러나 앎의 관점에서는 이상적인 환경이다. 변화의 큰물결은 앎이 기다려온 도전이다. 변화의 큰물결은 공헌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 인류에게 새로운 기반을 주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해줄 수 있는 기반이다. 앎은 당신 힘의 핵심이며, 당신의 가장 강한 부분이다. 앎은 신에 연결된 당신의 일부분이다. 신이 당신에게 말하는 것은 바로 앎을 통해서다.

많은 사람이 신은 은혜로운 삶, 즐겁고 평화로운 환경을 제공해주려고 이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신이 이곳 환경을 관리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상황이 통제불능 상태가 되거나 비극이 닥치고 사회구조가 무너지면, 신에 대한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큰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 행복과 만족을 보장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행복과 만족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거나, 어쨌든 신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신은 세상이 어렵고 위험한 곳임을 안다. 그래서 신은 당신 내면에 앎을 심어놓았다. 그러니 당신이 믿음을 두어야 할 곳은 바로 이 신비한 지성, 확실성과 가야 할 방향을 순간적으로 한 번씩 체험하게 하는 이 지성이어야 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실패할 것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부정확하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판명될 수 있지만, 앎은 당신 내면에 살아 있다. 앎은 신비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앎을 규정할 수도, 통제할 수도, 이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앎은 이성이 쓰는 도구가 아니다. 당신은 부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적을 무찌르는 일에 앎을 이용할 수 없다.

앎은 이성보다 훨씬 더 강력하며, 이성에 구속받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앎의 힘과 현존을 체험하는 데, 대부분의 경우 당신의 마음이나 생각이 방해물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성에 방해받을 뿐이다.

오직 앎만이 끊임없이 커져가는 불확실성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것이다. 당신이 삶에서 방향을 천 번이나 바꾸어야 한다 하더라도, 앎은 당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도록 안내할 것이다. 앎이 아니면, 그 무엇이 당신에게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이런 지혜와 평정심을 갖고 이처럼 당신을 안내하겠는가?

정부 지도자들이 안전과 안보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고, 정부에서도 여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겠지만, 당신은 여기에만 희망을 품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정부가 가진 자원은 한계가 있을 것이며, 정부기관은 엄청난 압력을 받을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적절히 공급해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도 정부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앎을 따를 수 있다면, 또한 앎의 현존을 받아들이고 앎과 관계 맺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당신 마음을 열 수 있다면, 당신을 안내하는 것은 여전히 앎이다. 앎은 당신을 재앙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주고, 자멸로 이끄는 결정을 못 하게 하며, 더 큰 어려움으로 이끄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도록 해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앎은 당신에게 필요한 힘과 자신감을 줄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저항하기 힘들 만큼 매우 험악하고 당혹스러운 상황이 당신의 참된 선물을 베풀 수 있는 바로 그 상황이다. 이는 앎이 이 상황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당신에게는 예기치 못한 일이다. 자신에 대한 당신의 관념이나 당신의 이성에게는 예기치 못한 일이며, 재앙이나 비극, 큰 불행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앎에게는 이것이 바로 완벽한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아주 특별한 사건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기심이나 허약함, 자학이나 개인적 탐닉에서 벗어난다.

당신은 이 특별한 사건이 당신 뜻대로 돌아갈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사건 자체는 매우 쉽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정확히 상황들이 어떤 식으로 발생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황이 당신 뜻대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니, 상황을 믿어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이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고, 비극적인 결과가 일어나기 매우 쉽기 때문이다. 당신이 잘 헤쳐나가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잘 헤쳐나갈 것인지 당신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앎과 함께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이런 확신이나 자신감이 없을 것이다.

믿음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믿음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것인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인류를 이끌어갈 해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나타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정부나 종교계에 지도자가 되기를 열망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앎에 인도받았는지 개인적 야심에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는 거짓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날 것이며, 나쁜 정보나 안내를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 중에는 참으로 위험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로지 앎만이 당신에게 이들을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르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이나 확실성을 얻기 위해 바로 코앞만 바라보는 사람은 혼란에 빠지거나 심지어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 내면의 앎은 혼란에 빠지지 않으며, 절망하지 않는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급변하는 어떤 상황이 와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맞설 수 있으며, 용기를 잃거나 남을 비난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다. 그래서 앎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쩌면 당신에게 앎은 수수께끼와 같은 것으로 좀처럼 체험하기도 어렵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멀리 떨어져 있거나 매우 미약한 어떤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앎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다가오는 시기에는 당신이 믿고 있는 아주 많은 것들을 믿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당신이 아주 많은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많은 것과 관련하여 당신이 막연히 가정하고 있는 것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당신을 돌봐주고 부양해주며 미래를 보장해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이제 심각하게 의문을 품고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당신은 냉소적이 되고 적대적이 되며, 절망하고 분노할 것이다.

당신은 길이 없는 울창한 숲을 요리조리 헤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때 무엇이 당신을 안내하고, 무엇이 당신을 이끌 것인가? 당신이 믿었던 다른 모든 것에 실망하고 나면, 이때 무엇이 당신을 이끌 것인가? 당신은 가족을 믿을 수도 있겠지만, 당신 가족은 혼란에 빠지고 갈등을 겪을지도 모른다. 또 당신과 깊이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믿을 수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은 두려움이나 분노, 혼란에 굴복할지도 모른다.

앎으로 강한 사람들을 믿는 것은 가치가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그들을 따르도록 힘을 주는 것은 당신 내면의 앎이다. 누구도 실수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당신 내면의 힘이 그들 실수를 막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그들이 당신 실수를 막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앎에 인도를 받은 관계의 힘이다. 그러나 정말 달라지게 만드는 것은 여전히 개개인의 핵심에 있는 앎이다.

앎으로 강해진다는 것은 당신의 충성이 앎으로 바뀐다는 뜻이며, 앎에서 체험의 기반을 쌓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제 앎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단순히 희망·바람·가정이 아니라, 점점 커지는 체험에 기반을 둔다. 이것이 올바른 믿음이다.

그러나 믿음 그 자체에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수동적이어서는 안 된다. 앎이 모든 것에서 당신을 안내할 것이니 당신은 그저 어린아이처럼 따라가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의 이성을 활용해야 할 것이며, 모든 감각, 모든 기술, 모든 주의를 끌어다 활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마치 빙판길을 매우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걸어가듯 당신의 온 능력을 다 발휘하여 삶을 헤쳐 나가야 하고 이 도전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신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거저 줄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결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모든 정성과 힘과 재능을 쏟아부어야 할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이것이 당신을 구원한다. 그리하여 당신이 하나가 되고 완전해진다. 당신은 서로 다른 개성, 서로 다른 야심, 상반되는 목표를 한데 모아놓은 집합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한 곳에 집중하여 조직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한마음에 인도받을 것이다. 이때 어려운 상황들이 당신에게 구원이 되고,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 국가들에 구원이 된다.

당신은 변화의 큰물결 앞에서 매우 큰 결정들을 내려야 할 것이다. 아마 그 결정들은 지금까지 당신이 내린 어떤 것보다 더 클지도 모른다.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더 약한 사람, 이런 결정을 내릴 힘이 없거나 앎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안내해야 할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끝없이 갈팡질팡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며, 오랫동안 우유부단해서는 안 된다. 당신은 큰 결정들을 내려 행동에 옮겨야 할 것이고, 자신감 부족이나 두려움, 불안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당신에게 이렇게 할 힘을 줄 것인가? 인간 지도자들을 믿을 것인가? 인간이 조직한 기관이나 단체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멀리 떨어져 있는 신을 믿을 것인가?

사람들은 그들의 믿음을 매우 많은 것에 부적절하게 두고 있으므로 대규모로 격변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사람들은 과학기술 자체가 만든 문제나 사람들이 만들어낸 모든 문제를 과학기술이 해결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과학기술을 믿는다. 새로운 기계장치를 발명하거나 새로운 에너지원을 찾으면, 그들은 모든 것이 해결될 것으로 생각한다. 쉽게 차세대 에너지 체계로 전환할 것이며, 전환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불편함과 불확실성을 겪기만 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과학기술이 그들의 신이 되었다. 과학기술이 그들에게 안정과 부와 힘을 주면서 그들을 부양하고 구원해줄 것으로 믿는다.

과학기술은 변화의 큰물결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어야 하겠지만, 기술만으로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다. 자연의 힘은 항상 기술을 압도한다. 현대인은 이 교훈을 잊고 살아왔다. 경이로운 과학기술은 많은 편리한 것을 가져다주었고,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약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변화의 큰물결 앞에서는 이 기술의 도움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이 기술이 새로이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내지 못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기술의 혜택을 보지는 못할 것이며, 어떤 경우는 그 기술력이 부족할 것이다.

충분한 석유가 없다면, 어떻게 자동차나 농기계를 굴리며, 교통체계나 정부를 운영할 것인가? 많은 사람이 세상에 석유가 무한정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믿음이고 희망이고 바람이고 기대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확실성이 없다. 사람들은 문제를 조사해보지 않는다. 그래서 자원이 고갈되는 세상에 인류가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이 모든 자원이 그냥 있는 것으로만 믿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계속 더 쓰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자원은 항상 그냥 있는 것이며, 무한정 얻을 수 있으니, 실제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믿음이다. 인류가 살아온 역사를 살펴본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환상이지만, 많은 사람이 이 환상에 삶의 기반을 두고 이 환상 속에서 산다. 그들은 이 환상에 결코 의문을 품지 않으며, 굳게 믿고 있다. 정계나 재계 지도자들도 이 환상을 굳게 믿고 있다.

사람들은 변화의 큰물결이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큰물결을 만나고 나면, 신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변화의 큰물결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며, 인류가 세상에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당신은 인류가 지구에 어떤 충격을 주어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지구가 급격히 변하여 다른 형태의 안정 상태로 들어가는 일 없이 인간의 오용과 악용을 끝없이 흡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지구는 변하지 않을 것이고 인류는 지구를 변하게 하거나 혼란에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지구는 변하고 있으며, 혼란 상태에 빠지고 있다. 지금은 시작일 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믿으며, 이것은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것은 희망이자 꿈이며,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열망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믿음은 극단적으로 무지한 것, 환상과 기대에 기반을 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섬겨야 하므로 무엇인가를 믿기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믿음을 가진다. 그래서 참으로 중대한 문제는 이 믿음을 어디에 두었느냐, 이 믿음이 담고 있는 기대가 무엇이냐 하는 점이다.

당신은 가장 먼저 앎에 믿음을 두어야 한다. 즉, 당신 내면의 앎과 다른 사람들 내면의 앎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앎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의문·혼란·의심 속에 빠질 수 있다. 그러니 당신은 꼭 필요한 것이자 불멸의 것, 신에게서 직접 나온 것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이것이 큰 믿음이고, 이것이 앎의 힘과 현존이며, 이것이 당신 삶에 있는 진리의 큰 줄기다. 그러니 당신의 힘을 여기에서 쌓으라. 그러면 미래가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두려운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불확실성을 큰 힘과 결단력으로 직면할 수 있다. 당신에게는 큰 변화가 오기 전에 미리 당신 상황을 바꿀 힘이 있고, 큰 변화 앞에서도 당신 상황을 바꿀 힘이 있다.

이것은 당신의 충성이 다른 곳으로 바뀌었음을 뜻한다. 이것이 당신 내면에 필요한 변화다. 이때 당신에게 평정심과 힘과 용기가 생긴다. 왜냐하면 앎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에 충성하면, 당신은 남들의 의견이나 행동에 구속받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것들에 믿음을 둔 사람들이 좌절하기 시작할 때, 당신은 주위 모든 사람이 느낄 엄청난 실망과 좌절에서 벗어날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할 때, 당신은 두려움에서 벗어나 극적이면서도 훌륭한 행동을 취할 것이다.

이것이 큰 믿음이다. 그래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것이 당신의 가장 큰 희망이자 약속을 나타낸다. 앎에 인도받은 인간의 모든 노력, 모든 발명, 모든 창의력에는 힘과 방향이 있고 참된 약속이 있다.

그래서 문제는 당신이 믿음을 어디에 두느냐이다. 당신은 믿음을 어디에 둘 것인가?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은 믿음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에게 참된 힘, 자신감, 용기, 결단력을 줄 것인가? 무엇이 당신에게 힘을 주어 개인의 약점과 야심을 극복하게 해주고, 억압받는 마음이나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게 해주며, 큰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사회의 길들이기를 극복하게 해줄 것인가? 무엇이 두려움과 절망에서 당신을 지켜줄 것인가?

당신 내면에 깊은 힘이 있다. 당신은 지금 이 힘을 찾아야 한다. 당신이 변화의 큰물결을 대비하면서 지금 이 힘과의 관계를 구축하고 이 힘의 목적이 당신에게 드러나도록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때, 이 힘을 찾아야 한다. 이 힘은 당신이 삶을 깊이 점검하도록 안내할 것이고, 삶의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미리 생각할 수 있고, 미리 내다볼 수 있으며, 미리 대비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신이 당신과 다른 모든 사람의 내면에 심어놓은 앎을 믿는다는 것이다. 신은 앎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말하고, 앎을 통해서 사람들을 움직이며, 앎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앎을 통해서 어려움에 처한 인류와 세상에 공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