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Text


1994년 10월 14일
미국 콜로라도 보울더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제3편 > 앎길을 따르는 삶 > 제9장

당신이 이 가르침의 중요성, 즉 이 가르침에 담긴 인류를 위한 큰 메시지, 이 시기와 미래를 위한 이 메시지가 지닌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하므로, 어떤 개념들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이 이해하는 만큼 최대한 모든 가르침을 공유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일단 당신이 혼자서 경이로운 것들을 발견하면, 그것들을 알리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앎길을 전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사람들이 앎 없이 산다는 것이고, 비록 개개인에게 앎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처음에는 앎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앎은 그들의 체험이나 관념에 이질적으로 보이고, 사실 그들의 교육에도 이질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당신은 강력하고 신비로운 무언가를 전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단지 강력하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붙잡고 가능한 한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고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단지 신비롭기만 하다면, 사람들의 마음은 그것에 끌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앎길은 강력하고도 신비로우므로, 배우는 데 큰 도전이 된다.

앎의 초보 학생으로서, 당신은 기존의 생각과 믿음이 삶의 두 번째 큰 단계에 대비하여 당신을 준비시키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물론, 어떤 것들은 계속 가져가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당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이 가르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 당신은 사실 그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마치 앎길이 단순히 자신이 항상 하던 것을 계속하기 위한 도구나 자원인 것처럼 앎길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 혹은 어쩌면 앎길이 그들에게 더 큰 가능성을 줄 것처럼 보이므로 앎길에 끌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음, 어쩌면 내가 이것을 이용하여 관계를 맺을 수도 있어.” 혹은 “어쩌면 내가 이것을 이용하여 돈을 딸 수도 있어.”, “어쩌면 내가 이것을 이용하여 더 강력해질 수도 있어.”, “아마도 내가 이것을 이용하면 세상에서 아주 힘들게 일할 필요가 없을 거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가시 존재들은 그들이 제공하는 것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당신은 마음의 결핍과 불안을 뛰어넘어 바라볼 수 있고, 절실히 필요한 것과 강한 열망을 느낄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불가시 존재들이 당신에게 제공하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신이 세상에서 하는 일을 이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가 여기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여기 와서 주기로 한 것을 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의 차이를 자기 내면에서 스스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체험하지 못했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당신이 어떻게 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당신이 큰 공동체 앎길이나 이 책에 있는 개념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에게 여기서 제공되는 것을 받아들일 시간을 주라. 여기서 제공되는 것은 매우 크다. 이것은 삶의 전환점이고, 새로운 시작이고, 완전히 새로운 교육이다. 이것은 참여자들에게 초보자가 되기를 요구하고, 겸손하고 마음을 열기를 요구하며, 신뢰할 수 있으면서도 분별력이 있기를 요구하고, 생각보다는 체험에 가치를 두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답을 얻지 못한 물음들을 답이 없는 채로 두고,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해결되지 않은 채로 두고, 이루어지지 않은 기대들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두기를 요구한다.

사람들은 앎길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자신들이 생각한 만큼 사람들의 마음이 열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종종 충격을 받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저항하거나 걱정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만약 이 가르침이 위대하지도 포괄적이지도 않다면, 이런 반응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실적이고 실질적이므로, 받는 사람들이 응답하는 방법에는 세 가지 선택지만 있다. 그들은 가르침을 향해 나아가거나, 가르침에서 멀어지거나, 가르침에 맞서 싸울 수 있다. 앎 앞에서는 마음이 이 세 가지 중 하나만 할 수 있다. 소수는 나아가고, 소수는 싸우며, 대부분은 탈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실제와는 다른 인상을 주려는 시도와는 상관없이, 삶에서 그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은 매우 확신에 차 있어 보이고, 매우 의기양양하고 강해 보이고, 또 의지가 굳어 보이는데, 앎 앞에서 빠르게 시들해지는 것을 당신은 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연약해 보이고, 겸손하고 얌전해 보이는데 여기서 제공하는 큰 준비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당신은 아마도 볼 것이다. 여기서 때로는 강자가 실제로는 약하고, 약자가 실제로는 강한 것처럼 보인다.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강하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 의지력인가? 즉, 당신이 원하는 것을 삶이 당신에게 주도록 삶을 지배하려 하거나, 당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을 그들이 당신에게 해 주도록 그들의 경험을 통제하려는 시도인가? 그것이 강한 것인가? 아니면 강한 것이란 진실한 어떤 것을 분별하고 그것에 응답하는 능력인가? 또 남들은 겁을 먹고 숨을 곳을 찾아 도망칠 때, 당신은 진실하고 참된 어떤 것에 삶을 내주는 능력인가? 그리고 명석한 이성과 완강한 철학이 앎의 진정한 선구자인가 아니면 앎을 대신하는 데 쓰이는가?

앎길을 배울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절실히 필요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 아니겠는가? 즉, 세상의 쾌락과 보상으로는 충족될 수 없는 절실히 필요한 것을 체험하는 사람, 또 다른 사람들이 자기 시대와 다가올 시대에 대해 행복하거나 두려운 예측을 많이 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움직임과 방향을 느낄 만큼 그 사람들과 현실감각이 충분히 다른 사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앎길을 공유하는 것은 전하는 이에게는 분별력을 배우는 것이고, 전달받는 이에게는 진실과 실질적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 가르침이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듣자마자, 어떤 사람들은 “아, 그럼,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일 리가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앎길이 제공하고 전하는 것을 모든 사람이 실천하고 연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방법, 어쩌면 더 쉬운 방법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이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길이 있다. 불가시 존재들 말고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앎에서 도망치는 사람 중 일부는 앎의 학생이 되기로 되어 있으며, 앎에 친밀감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준비의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이때 판단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생각이나 선언, 또는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의 위치와는 달리, 삶에서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어떻게 실연하는지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래서 앎길을 전하는 사람은 근본적인 현실, 깊이 인지하고 고려해야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들은 겉보기와는 다르며, 그들이 삶에서 진짜 도전과 진짜 기회에 직면할 때만, 당신은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하는지 볼 것이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세상에서 좋게 보이고 싶어 한다. 모든 사람은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실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을 약하게 하는가? 강하게 하는가? 유능하게 하는가? 무능하게 하는가? 책임지게 하는가? 무책임하게 하는가?

판단하지 말라. 그저 바라보고 지켜보라. 앎길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자신의 삶에서 앎의 기반을 쌓기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머지않아 앞으로 나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갈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생각과 더 잘 어울려 보이고, 또 더 쉽거나 더 즐거워 보이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과 자신의 열망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오랫동안 앎길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만을 기반으로 자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결정할 수 있다고 실제로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에 상황은 훨씬 더 어려워진다. 만약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결정할 수 있다면, 당신은 오늘날 세상에서 사람들이 범한 많은 실수를 이 정도로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에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거나, 아니면 일련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그들은 그들 내면에 있는 큰 힘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선물을 거절하거나 거부하더라도 충격받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라. 당신이 그들에게 실제로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당신은 그들에게 궁극적인 도전을 제공하고 있고, 그들 자신과 맞서는 것을 제공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이 자신에게 전적으로 정직해지는 방법과 과거에 얼마나 부정직했는지를 깨닫는 방법을 그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의 삶을 바꾸거나 새롭게 하는 수단을 주고 있으며, 그들이 지금까지 쌓은 삶의 일부나 전체를 뒤에 남겨두고 떠날 수단을 주고 있다. 당신은 그들에게 그들 내면에 있는 진실의 참된 기반을 주기 위해 그들 자신의 믿음과 이상에 이의를 제기할 수단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안해하거나 저항하고 의심하는 반응을 보이더라도, 이것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당신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을 유념하라. 그들은 당신이 제공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지, 당신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비판적이어서, 오직 영웅만이 진짜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을 제공할 수 있는데 당신은 그런 영웅이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사람들이 강의를 들은 후에 “음, 연사가 별로 좋지 않았어!”라고 하거나, “나는 그들이 이것에 대해 말한 것은 좋았지만 저것에 대해서는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듣는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때, 당신은 그들이 정말로 듣기라도 했는지, 그들이 실제로 느껴 보기라도 했는지 의심해야 한다.

당신은 앎의 공헌자로 평가받겠지만, 영웅이 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당신이 완벽하게 말하거나 완벽하게 설명하거나 완벽한 사람이 될 것으로는 기대되지 않는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당신이 더 큰 것에 응답하는 것, 그 큰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꺼이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제공에 반응하는 방식에서, 그들은 당신에 관해서보다는 그들 자신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들 삶과 성장에서 어디쯤 있는지, 앎에서 얼마나 가까이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지 당신이 모르는데, 어떻게 그들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알 수 없다. 당신이 알 수 없으면, 결정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만약 당신이 그런 상태에서 결정한다면, 속을 것이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한 어떤 것에 매우 관심이 있고 준비되었다고 당신이 생각한 사람이, 막상 진짜 기회가 왔을 때는 피하고, 응답하지 않으며, 이것이 제공될 때 듣지도 않거나, 느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앎길을 배우는 것에 남달리 관심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냥 앎길을 배우기 시작하고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면 당신은 돌아서서 “흠,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이 사람은 이 일에 아주 적합한 것 같은데도 하질 못하고, 이 사람은 내가 아무런 설득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 시작했어.”라고 말한다.

앎길을 전할 때, 당신은 분별력과 신중함을 배우는 데 필요한 귀중한 교훈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진짜 가치 있고 훌륭한 어떤 것을 전할 때, 사람들이 세 가지 방식 중 하나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통해 당신은 아마도 이전에 당신이 볼 수 있던 것보다 그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그들에게 부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것을 제공하고 있거나, 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것을 제공하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것을 제공하면, 즉시 연결된다. 당신이 적절한 것을 부적절한 시기에 제공하면, 나중에 연결된다. 당신이 적절한 시기에 부적절한 것을 제공한다면, 당신은 그저 그들에게 필요한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처음부터 그들 삶을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실제로 어떤 기회가 필요한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은 처음부터 그들 삶을 지켜보지 않았으니, 이런 결정을 내리지 말라. 선물을 주고, 준비된 사람이 시작하게 하라. 그러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은 비난받는 일 없이 그들의 길을 갈 수 있다. 당신은 그들이 왜 준비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창조주는 어떤 형태로든 모든 이에게 앎길을 제공한다. 몇몇은 준비가 되었고, 대부분은 응답하지 않는다. 장담하건대, 창조주는 그들을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이가 종국에는 응답하겠지만, 그것은 아주 멀고도 먼 미래가 될 수 있다. 결국, 모든 이가 그들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겠지만, 이것은 훨씬 요원할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빠르게 나아갈 것이다. 큰 공동체 세력들이 세상에 있다. 인류는 전 지구적 문제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표류하고, 자기 마음 안에서 길을 잃었다.

누가 이와 같은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가? 누가 앎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한 요구와 요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만약 사람들 대부분이 처음부터 그들이 직면하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오, 나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감당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그들의 힘을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힘을 드러낼 정말 완벽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헌신을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헌신을 드러낼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자기 신뢰를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자기 신뢰를 드러낼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능력을 요청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그들의 능력을 드러낼 것이다. 오직 당신 내면에 있는 큰 힘을 요청하는 방법만이 당신에게 이 힘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쉬운 길, 편안한 길, 행복한 길, 아주 즐거운 길, 당신을 괴롭히거나 방해하지 않는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세상이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세상이 어느 발전 단계에 있는지 당신이 알 수 있다면, 또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전반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신이 얼마나 강해져야 하는지, 당신 내면에서 얼마나 통합되어야 하는지, 당신 삶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워지고 결속되어야 하는지 알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환영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렇게 하는 것의 가치를 알 것이고, 이것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류가 얼마나 나약한지 알 것이고, 이 나약함이 지구 안에서 일어나는 인류의 삶뿐만 아니라, 큰 공동체와 상호작용하는 측면에서도, 인류의 미래와 안녕을 얼마나 위태롭게 하는지 알 것이다. 큰 공동체는 고도로 집중되고 통합된 집단들의 표본일 것이고, 이 집단은 통합된 마음과 집중력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개인들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기술뿐만 아니라 사고력과 결단력에서도 우월하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끼고 싶어 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위안을 주고 안심시키는 말을 해주고 싶어 하며, 실제로는 그들을 부르는 앎인 그들 내면의 불안을 상쇄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오히려 오늘과 내일이 행복하기를 원하므로, 도취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바라는 것을 주는 이념이나 안심시켜주는 것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알고 싶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고, 반드시 행동해야 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들은 미래의 희생자가 되지, 미래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삶이 그들을 압도하고, 그들은 준비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삶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해 괴로워하고 분개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삶이 다른 식으로 되어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삶이 그들을 배신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삶을 배신했는가? 삶이 어려운 상황에서 그들에게 등을 돌렸는가, 아니면 단지 그들이 삶에 응답할 수 없었는가? 삶은 흘러간다. 인류는 운명이 있고 진화한다. 지구는 큰 공동체에 출현하고 있다. 삶은 사람들이 마음을 먹도록 기다리지 않는다. 삶은 계속 나아간다. 큰 공동체는 사람들이 마음을 먹도록 기다리지 않는다. 큰 공동체는 개입하고 있다. 자연의 물질계는 인류가 마음을 먹도록 기다리지 않는다. 자연의 물질계는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다.

당신이 깨어나기 시작할 때, 깨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깨닫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당신의 곤경이다. 이것은 반드시 행복한 자각은 아니다. 물론 이것은 당신이 정말로 느끼는 것을 마침내 느끼고, 당신이 정말로 아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는 큰 안도감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처음에 보는 것은 당신의 곤경이다. 당신은 “오, 이런! 오, 세상에!”라고 말하며, 곤경을 느끼고 안다. 그 곤경은 강력하다. 당신은 “내가 그저 부정적인가? 내가 그저 겁먹고 있는가? 아니면 정말 이런 것인가?”라고 자문한다. 삶은 정말 이런 것이다.

당신이 몇 년 동안 청구서를 지불하는 것을 잊었다가 어느 날 청구서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났을 때, 상황은 꽤 난처할 것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대응하지 않았다. 인류가 대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상황은 꽤 난처할 것이다. 당신은 편히 앉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무엇인가를 해야 할 것이다. 행동하도록 부름을 받을 것이고, 삶에서 해야 할 일로 되돌아갈 것이다. 이것은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고 삶에도 좋은 일이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당신이 앎길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때, “이것을 읽어보라.”라거나, “이것을 숙고해보라.”라고 말하는 것밖에 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그들에게 깨어나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깨어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려운 과정이다. 당신은 그들에게 끝이 없어 보이는 몽상과 추측의 무게를 벗어 던지고, 큰 혼란뿐만 아니라 큰 고통도 있는 세상 상황에서 깨어나도록 요구하고 있다. 당신은 앎길을 전할 때, 그들에게 이것을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신은 그들에게 가장 큰 도전을 주고 있고, 궁극적인 선물을 주고 있다.

창조주의 계획은 사람들에게 서로 깨우도록 요구한다. 이제, 이 과정을 시작하고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불가시 존재들은 몇몇 사람을 깨워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계속 다시 잠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계속 벨을 눌러야 한다. 누군가는 계속 불을 켜고 커튼을 걷어 올려야 한다. 이것은 마치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당신은 매우 피곤해서, 한쪽 눈을 뜨고 “아니, 됐어!”라고 말한다.

단순히 누군가에게 앎길과 관련된 어떤 것을 읽어 보게 하거나 그것을 숙고해보게 하는 것만으로, 또 이 글을 보여주고,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한 우리의 말을 그들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그들에게 궁극적인 도전을 주고, 궁극적인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천사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잠에서 깨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을 깨우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격려하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도전 의식을 북돋으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도우려면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것은 영적 복지가 아님을 잊지 말라. 삶은 천국의 특혜를 나눠주는 커다란 복지 체계가 아니다. 당신들은 모두 앎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미 하늘의 특혜를 받았다. 앎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고, 당신을 부르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것을 당신에게 요청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공부하고 숙고하는 것을 숙고할 기회를 줄 것이다. 이때 사람들은 이 순간 그들이 실제로 어떤 상태에 있는지 당신에게 드러내 보여주겠지만, 당신은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들이 “아니, 절대로! 불가능해! 내가 이런 것을 공부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일주일이나 한 달, 혹은 일 년 후에 돌아와서는 “당신이 나에게 말한 것들을 생각해 보았는데, 그것들이 나에게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아, 물론이지! 이것은 신성하고, 영적이고, 정말 멋지다. 이것이 마음에 든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학생으로서 일주일도 버티지 못한다. 그들은 심지어 시작도 하지 못하고, 다음 것으로 가 있다. 그들은 자신을 내줄 수 없으며, 헌신할 수 없다.

사람들이 앎길을 반대할 때, 그들은 앎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앎길에 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앎길에 내줄 수도 없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대안은 앎길과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하다. 왜냐하면 앎길이 그들에게 맞지 않는다면, 그냥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떠날 수 없다. 그들은 앎길을 원하면서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앎길에 이끌리지만, 자신이 앎길에 다가가는 것을 용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앎길이 필요하지만, 필요하지 않기를 원한다. 그들은 앎길이 의미하는 것을 다루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앎길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은 목적이 있어 이곳에 파견되었고, 이 목적이 그들을 부르고 있으며 그들은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삶을 마치 휴가를 나온 것처럼 대한다. 그들은 이제 일하러 돌아갈 시간이라는, 집에서 보내온 메시지를 받기를 원하는가? 지금은 당신이 있는 곳에서 일할 시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주와 그들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복지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복지 점검이 기각되고 그 대신 작업 지시를 받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불가시 존재들과 접촉하기를 갈망하고 창조주의 천사를 알현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이자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단순히 업무 복귀의 부름을 받는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그들이 삶에 있는 영적 존재들과 아름답고 황홀한 교감과 막간의 대화를 바라고 있는데, 어느 날 “당신은 준비가 되었고, 이제 일하러 가야 할 때이다.”라는 메시지를 받으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받는 것은 작업 지시이다. 그들은 신이 파견하였다. 그들이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는 불만스러운 개인적 삶에서 벗어나도록 부름을 받았으며, 그들은 완전히 다른 어떤 일을 하러 가야 한다.

사람들은 평화와 해결을 위해 기도하고, 안내와 의미를 위해 기도한다. 그리고 그 답이 오면, 누가 그 답을 원하는가? 당신이 구덩이에 빠져 있고 사방이 어둡고 어둠이 당신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당신이 기도하고, 당신에게 영적 행복과 천사의 힘과 놀라운 체험에 대한 비전이 있는데, 당신이 응답으로 받은 것은 당신에게 필요한 사다리라면, 당신은 그것이 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는가? 당신이 원하는 것과 당신에게 필요한 것의 차이가 보이는가? 여기에는 정직이 필요하다. 이것은 매우 분명하지만, 누가 이것을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정말 진실하지만, 누가 이것을 가치 있게 여길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매우 현실적이지만 누가 이것을 접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삶에 봉사하고 인류에게 봉사하는 데 자신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모든 사람이 기반을 쌓을 필요가 있다. 만약 당신이 기반을 쌓을 수 없다면, 사명을 가질 수 없다. 기반을 쌓는 것은 단순히 고통받고, 혼란스럽고, 좌절하고,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것은 단순히 당신 내면에서 혼란스럽고 고통받는 것이다. 당신은 기반을 쌓을 수 있는가? 모든 사람은 기반을 쌓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명백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현재 마음 상태와 현재 상황에서는 큰 삶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연약한 기반 위에 큰 구조물을 놓을 수 없다. 당신은 큰 일을 체험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고, 간직할 수도, 지킬 수도 없는 사람에게 큰 일을 줄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금의 자신보다 더 강하거나 더 약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이 그들에게 전해질 때까지, 즉 중요한 도전이나 기회가 그들에게 와서 그들이 실제로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고, 그 순간 그들의 진짜 강점과 약점을 드러낼 때까지, 그들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누가 정말로 알겠는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 마주침을 완전히 회피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힘이 실제 어느 정도인지 알아내고 싶어 해서, 그 도전에 응한다.

세상의 삶은 바뀌었지만, 인류는 대응하지 않았다. 상황이 위급해졌지만,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 이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즐거운 취미를 자유롭게 계속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면, 그들은 재앙으로 치닫게 된다. 그들은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알리는 조기 경고 신호를 보지 못하며, 앎의 의향과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과 세상에 응답하지 않고, 자신의 불편함이 단순히 심리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밤에 집안을 서성거리거나 잠을 편히 잘 수가 없다. 그리고 불안감이 들면, “음, 이것은 단지 내 심리적 문제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들은 세상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느낄 수 있는 범위에서도, 그것을 잘못 해석한다.

가볍게 툭툭 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을 깨우려면, 매우 강한 처방이 필요하다. 그들은 한 시간 전에 울린 알람을 듣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꿈에 너무 빠져 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누군가를 깨우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당신은 그들을 깨워야 하므로, 다른 어떤 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찬물을 한 바가지 사용한다. 그들은 계속 꿈을 꾸고 있고, 집은 불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을 때까지는 당신이 그들을 깨우는 것을 그들은 큰 침입으로 여긴다. 그런 다음, 당신을 보고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라고 말한다.

앎길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메시지의 한 측면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을 깨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들으면, 당신은 그들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그들은 당신 말을 들을 수도 있고, 듣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당신 말을 들을 수 없다면, 당신 말이 얼마나 훌륭하고 듣기 좋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단지 당신 말을 오락으로 여길 것이다. 만약 그들이 보지도, 느끼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집에 불이 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세상에서는 집이 천천히 불타고 있다. 어쩌면 당신은 연기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신은 지금 세상의 고난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을 불안하게 하는 상당 부분은 당신의 심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당신을 괴롭히는 상당 부분은 당신의 개인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것이 당신의 개인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당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불편함을 느낀다. 어쩌면 당신의 감정과 관련해서는 전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저 안절부절못하거나 불안해한다.

당신은 이미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폭풍이 오기 전에 동물들은 행동이 달라진다. 동물들은 어떤 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며, 일기예보를 보지 않고서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사방에 적막감이 엄습한다. 작은 새나 작은 쥐, 작은 토끼가 훌륭한 이성과 멋진 생각을 지닌 인간보다 더 지능이 높은가? 당신은 동물들의 지능이 더 높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동물들이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큰 공동체에서는 지능이 삶에 적응하고 대응하려는 열망과 능력으로 측정된다. 지능을 이렇게 정의하면, 인류는 매우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환경과 자신의 깊은 성향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가지고 놀 도구와 장난감을 새로 만드는 것이 지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영에 반응할 수 없고, 몸에 반응할 수 없다면, 즉 개인적 몸이나 자연의 몸에 반응할 수 없다면, 마음은 영에 봉사하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자기 삶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다면, 훌륭한 철학을 갖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큰 공동체 앎길을 전달받을 때, 당신이 준비할 기회를 완전히 놓친다면, 훌륭한 영적 사상과 믿음과 가정을 갖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영적 각성이 모두 지복과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큰 위안이 있고, 멋진 귀향길이 있다. 하지만 이때 당신은 당신과 세상이 처한 곤경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당신이 공황 상태에 빠지거나 겁에 질릴 것 같지는 않지만, 당신은 곧바로 일하러 갈 것이고, 계속해서 일할 것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일하기에 매우 늦었다. 여유 시간이 전혀 없다. 세상에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주어진 큰 일에 대비해 필요한 기반을 이미 구축한 사람들은 많은 휴가를 보낼 수 없다. 그들은 많이 쉬지 않는다. 그들은 꾸준히 지속적으로 일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매년 몇 주씩 보장된 휴가가 없다. 그들은 자신이 진짜 일을 하는 것을 특권으로 알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가 지극히 소중하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과 능력이 아무리 제한적이더라도, 그 재능과 능력에는 진정한 봉사와 장점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자기 지역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고, 그들의 영적 가족이 그들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누리는 삶의 특권과 휴식에 자신을 내주지 않는다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당신이 알아차릴 때, 당신은 세상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알아차린다. 즉, 세상과 자신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알아차리고, 세상과 당신 내면에 있는 끔찍한 고난을 알아차린다. 당신 체험은 다방면에서 많아진다. 당신은 그저 좋은 것만 알아차리고, 좋지 않은 것에는 귀를 막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적 삶은 많은 사람이 준비의 시작조차 못 하게 할 만큼 영적 삶의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상황에 관한 진실을 알아내기보다는 자신의 행복한 가정에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해야 하고, 응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히려 더 행복한 생각을 하고, “음, 신이 모든 것을 돌본다. 나는 모든 것을 성령에게 바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는 신은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아래에 있는 그곳의 문제들을 처리하기로 되어 있다”라고 말한다. 성령은 이 사실을 알고,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권한을 부여하기 위해 여기 있다. 왜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신의 일과 현존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신의 접근과 사람들의 기대 사이의 큰 차이가 이것의 일부를 설명해준다.

많은 사람은 영성이 아이스크림이나 쿠키, 모든 행복, 모든 위안과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온통 푸른 초원이다. 지구상의 천국! 우리 모두 해변으로, 영적 해변으로 가자! 그리고 우리는 용서하려고 할 것이고, 세상의 어둠과 고통과 비극 등 세상을 잊을 것이다. 우리는 더 행복한 세상을 보기 위해 이러한 것들을 못 본 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세상, 행복한 세상, 영적 해변이 있는 세상, 그곳에서 천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춤을 출 것이고, 우리는 마침내 매우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시련이나 고난도 없을 것이고, 더는 문제도 없을 것이며, 우리는 내면에서 더는 이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것이고, 이것은 더없이 행복하고 멋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여기 푸른 초원에 모일 것이고, 매우 행복할 것이다.

당신은 그 차이점이 보이는가? 사람들이 원하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가 보이는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믿는 것과 실제 세상 모습 사이의 차이가 보이는가? 세상의 아름다움이 무시되지만, 세상의 고난도 무시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큰 문제들을 보고, “이건 끔찍해!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해야 해! 정부가 이것에 대해 어떤 것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그럼, 내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이다. 이것은 신의 문제이다. “글쎄, 신은 전능하다. 신이 이것을 돌볼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이 무너지려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고, 모든 문제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재앙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가슴이 거부당하므로 사람들 내면에서 재앙으로 이어지고, 인류가 거부당하므로 세상에서 재앙으로 이어진다.

결국 당신이 기반을 쌓고 앎길을 배우면, 당신은 세상을 보는 큰 공동체 관점을 얻을 것이다. 이 관점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당신은 당신 삶을 그저 안에서 밖을 향해 보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사는 지구가 우주에서 매우 특별한 행성임을 알 것이다. 이곳에는 생물 자원이 가득한 진정한 보물창고가 있으며, 큰 공동체에서 이 지구만큼 자원을 부여받은 행성이 많지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알 것이다. 그렇지만 인류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른다. 인류는 귀중한 부동산을 깔고 앉아 있으며, 이 부동산은 단언하건대 큰 공동체의 다른 이들이 자신들을 위해 원한다. 아마도 인류가 지구의 현명한 관리인이라면, 그들은 인류의 관리권을 존중하겠지만, 인류의 관리권은 인정받지 못했고, 인류는 확실히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가 큰 공동체 전체의 자산으로 여겨지는 지구를 훼손하고 있다면, 큰 공동체에서 온 어떤 이들이 인류의 안녕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겠는가?

큰 공동체의 관점이 있으면, 당신은 분노와 비난이 아니라, 명확성과 균형감으로 당신 상황을 볼 수 있다. 큰 공동체 관점을 통해 인류의 발전과 단점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다른 지적 생명체와 자신을 비교한 적이 없으므로, 인류는 실제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혹은 약한지 알지 못한다. 사람들 간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으며, 밖에서 보면, 모든 사람은 어쨌든 비슷하다. 몇몇은 현명하고,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 간의 차이는 인류와 큰 공동체 다른 종족들 간의 차이만큼 크지 않다. 큰 공동체 종족들은 당신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을 뛰어넘는, 지적 생명체의 아주 다양한 범위를 보여준다.

그들은 비록 지구가 낯설고, 인류의 생활 방식과 관습이 낯설지만, 장담하건대 인류보다도 인류의 곤경을 더 분명하게 알 것이다. 지금 인간들 가운데, 그 곤경을 아는 사람들은 앎으로 강해져야 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관련된 문제들의 어려움이나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말 많은 에너지 때문만은 아니며,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 대한 양가성과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문제를 해결할 때만 집단행동의 열의를 보여주었다. 집에 불이 나면, 물론 모두 나와서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늦다. 그때가 되면, 지구적 규모에서, 너무 늦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인류가 합심하여 해낼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이것은 당신이 늦잠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만 어떻게든 재빠르게 움직여 제시간에 직장에 도착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해내는 접근 방식은 여기서 통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발밑에서 세상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그들은 이것이 경제 변화나 정치 변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영적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당신이 깨달음의 황금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이 뒤집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어나는 일을 물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는 움직임을 수많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느끼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그래서 문제를 느끼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고정관념이나 믿음에 따라 평가한다. 어떤 사람들은 끔찍한 재앙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축복의 시대 출현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정치 세계 질서나 새로운 금융 세계 질서를 본다. 그리고 그 밖의 다수는 전혀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사람들이 느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것을 정말 이해할 수 있으려면 앎의 기반을 쌓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저 그것에 대해 자기 생각을 투영할 뿐이다. 세상이 영적 깨달음의 직전에 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단지 그것이 사실이라는 증거만을 볼 것이다. 외계 세력이 지구에 도착하여, 인류를 큰 곤경에서 어떻게든 구해내고, 우리에게 평화롭게 사는 법을 가르칠 것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은 모든 것이 그것을 나타낸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차피 인류는 모두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것에 대한 증거를 볼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해석 중 어느 것도 앎을 나타내지 않는다.

큰 사건이 큰 공동체에서 벌어지며, 어떤 이는 지구 행성에서 경련을 일으킨다. 지구 행성에서 큰 사건이 벌어지며, 어떤 이는 밤에 잠을 잘 수 없고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당신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매우 두려워하는데, 그에 합당한 이유가 없으므로 이것은 비논리적이다. 당신은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삶과 연결되어 있으며, 큰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고, 당신 가족에게 일어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으며, 아직 만나지 못했으나 이 세상에 있는 당신 영적 가족인 이들에게 일어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이미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단순히 당신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당신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당신 내면에 내재한 큰 힘을 부르는 것 말고 무엇이겠는가? 천사들과 함께 구름 속을 떠도는 일은 없다.

지금 세상은 천천히 불타고 있는 배와 같다. 사람들은 배에서 내리고 싶어 하지만, 당신은 그 배를 돕기 위해 이곳에 파견되었다. 만약 당신이 영적 가족에게 너무 일찍 돌아간다면, 그들은 “여기서 뭐 하는 거야?”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오, 거기서 벗어나서 정말 기뻐! 저 아래는 끔찍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들은 “뭐라고? 당신은 20년 후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잖아!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무슨 메시지?”라고 말하며, 그때야 기억한다. 그때 당신은 세상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한 것을 모두 기억한다. 그때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나서, “오, 이런! 까맣게 잊고 있었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앎길을 보고, “오, 글쎄, 이것은 사랑이 아니야. 여기에는 사랑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에 관한 것이 아니라면, 이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적인 것은 모든 것에 관한 것이다. 영적인 것은 모든 것과 함께 있는 것이고, 모든 것과 함께 진실을 지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해변에 가고, 푸른 초원을 찾아다니며, 마치 천국에서 비용이 끝없이 들어가는 영구적인 여름휴가를 나온 아이와 같이, 온종일 행복하고 즐겁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앎길은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앎길은 걱정에 대응하는 것이며, 앎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이나 절망감, 무력감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앎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당신은 세상의 상황에 대처할 채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한 준비물의 일부를 세상에 가져왔다. 당신은 마치 낙하산 부대원과 같다. 당신은 장비를 한 벌 지니고 세상에 떨어졌다. 이곳에 내려오는 데 필요한 것과 당신이 세상을 돕기로 되어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돕는 데 필요한 모든 물자를 지니고 세상에 떨어졌다. 하지만 누가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기억할 수 있는가? 갑자기 당신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밀려들어 가, 밖으로 나가려고 할 것이다. 누가 낙하산 부분을 기억할 수 있는가?

세상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고, 이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합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온종일 웃고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계속 다과회를 여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달할 수 없는, 목적과 운명에 대한 성취와 감각을 체험한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앎길을 전했다. 앎길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라. 당신은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아낼 수 없으며,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당신 자신보다는 당신이 제공하는 것과 더 관련이 깊다. 특히 당신이 설명하는 것에 겸손하고, 당신의 불편함을 없애려고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납득시키려고 하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앎길을 전하라. 왜냐하면 인류는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돌아가서 낙하산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야 한다. 그들은 돌아가서 배낭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배낭에는 자신의 계획과 도구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앎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앎은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비밀리에 간직하고, 당신이 세상에 가져온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이르도록 당신을 기다린다.

당신은 세상에서 당신의 개인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은 경이롭기도 했고 끔찍하기도 했다. 이것은 이상한 여행이었지만, 이제는 진짜 일을 해야 할 때이다. 당신의 일이 무엇인지 안다고 아직 생각하지 말라.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곳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당신이 그 일이 무엇인지 찾았다고 해도, 그것은 바뀔 것이다. 거짓된 가정에 자신을 내주지 말고, 앎으로 가는 계단을 밟으라. 당신은 기반을 쌓으며, 이 기반을 쌓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세상에서 앎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신의 진정한 대변자가 될 수 있는 힘과 동반자와 지혜를 당신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당신이 영적 가족에게 돌아가면, 그들은 당신을 바라볼 것이고, 당신도 그들을 바라볼 것이며, 당신은 “그래, 기억해냈어. 당신들을 모두 기억해냈어. 나는 잠시 길을 잃었지만, 기억해냈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음, 우리가 계속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으니, 그거 잘됐어.”라고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