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1988년 9월 23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마샬 비안 서머즈가
받다

이 본문에 관하여


What you are reading in this text is the transcription of the original voice of the Angelic Assembly as it spoke through the Messenger Marshall Vian Summers.

Here, the original communication of God, which exists beyond words, is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and understanding by the Angelic Assembly who watch over the world. The Assembly then delivers God’s Message through the Messenger, whereafter it is transcribed and made available to you and to all people.

In this remarkable process, the Voice of Revelation is speaking anew. The Word and the Sound are in the world. May you be the recipient of this gift of Revelation and may you be open to receive its unique Message for you and for your life.


Wisdom from the Greater community, volume 1
제5편 > 큰공동체 지혜 1 > 제31장

치유는 사람들의 접근 방식 때문에 우리가 자주 다루지 않는 주제이다. 치유에 관한 견해가 많으며, 심지어 철학도 많다. 순수하게 신체를 물리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넘어서서, 질병의 원인과 특성과 치료에 대한 추론이 많다. 치료법은 당신이 얼마나 깊이 들어가고 싶어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기능 장애는 이곳에 있는 당신 삶 전체의 일부이므로, 그 장애만 분리하여 따로 떼어 내서는 안 된다. 만약 고질적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의 삶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삶 전체를 다루는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기꺼이 하려 하거나, 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탐구이므로, 그들은 단지 불편함에서 오는 증상만을 다루어 그 증상을 가능한 한 빠르고 쉽게 없애고자 한다.

우리의 임무는 더 큰 그림을 말하고 아주 완전한 틀에서 치유를 다루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앎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종 사람들은 집에 가져가서 시도해 볼 수 있는 치료법만을 원한다. 물론 그 치료법은 매우 제한적으로 성공하며, 지시 사항을 따르면 불편함을 완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치료법을 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의 삶 전체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함께 탐구할 수 있도록 몇 가지 개념을 알려주겠다.

가장 먼저, 육체에는 마법의 힘이 없다. 육체는 도구이자, 매개체이다. 사람들은 수준을 혼동하므로 이 말을 혼란스러워한다. 사람들은 영과 몸을 혼동하며, 영과 몸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 같은 속성을 지니기를 원하지만, 영과 몸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 말은 영과 몸이 분리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그 둘에서 같은 특성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같은 특성을 기대하면 당신은 영적 삶의 전체 경험을 깎아내리고, 당신의 육체적 삶을 불멸의 상태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육신은 매개체이다. 당신의 개인적 마음도 하나의 매개체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매개체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이것은 “이 매개체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매개체(vehicle, 운송 수단)는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단순히 당신이 쓰는 가면이 아니다. 매개체는 목적을 위해 당신을 어떤 곳으로 데려가기 위한 것이다.

물질적 삶에 들어오려면, 몸과 개인적 마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당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당신에게는 몸이 있고, 당신이 몸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개인적 마음이 있다. 몸과 마음은 둘 다 매개체이고, 완벽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몸과 마음은 둘 다 마모되고, 쇠약해지고, 골칫거리가 되기 쉽다. 만약 당신이 몸과 마음을 돌본다면 매우 잘 유지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매개체이므로 완벽하지 않다.

당신 관심의 대상을 전적으로 매개체에 두려고 할 때, 당신은 매개체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균형 잡힌 관점을 잃는다. 만약 몸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면, 당신은 몸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고, 대부분의 경우 매우 단순한 몸의 증상과 문제를 극도로 복잡하게 만들 것이다. 개인적 마음과 몸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서로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분명히, 당신의 육신은 당신의 감정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만약 당신이 아프거나 고통스러우면, 또 기분이 나쁘면,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매우 어렵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감정 상태는 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 둘 다 매개체로서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앎은 매개체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참 자아이며, 당신의 참마음이다. 앎은 개인적 표현을 찾지만, 한 개인이 아니다. 앎은 몸과 마음을 통해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충족시킨다. 이때 당신 몸이 제대로 이용되며, 비난이 아닌 인정을 받는다. 이때 당신의 개인적 마음이 일을 하고 자기 사랑을 되찾는다.

그렇다면 병이란 무엇인가? 왜 어떤 것들이 망가지는가? 몸은 망가지고 개인적 마음도 망가진다. 왜냐하면 몸과 마음은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은 매우 높은 수준에서 계속 일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복잡하지 않다. 당신은 단지 열망이 있어야 하고, 몸과 마음을 매개체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당신은 몸과 개인적 마음을 편안하게 유지하려고 하면서 당신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그러면 앉을 수 있는 좋은 의자를 갖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외에도, 당신은 개인적 마음이 항상 평온하고, 만족스럽고, 유쾌한 자극을 받도록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삶의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승을 떠날 때, 이 매개체들은 남겨두고 떠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매개체들과 너무 많이 동일시하면, 당신은 그것들이 당신의 전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때 당신은 그 너머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매개체를 빼앗길 수 있으므로 당신 삶이 두렵다. 매개체들은 쉽게 위협받는다.

만약 매개체를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그 매개체를 싫어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매개체가 당신을 옭아매는 것처럼 보일 것이며, 당신이 그 매개체에 갇혀 있고 구속을 받고 제한을 받는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매개체가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라면, 당신의 전체 삶은 매개체를 돌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매개체를 돌보며, 행복해지려고 애쓰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쓸 것이다. 하지만 당신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충족되지 않았고, 당신은 아직 자신의 기반을 찾지 못했다.

심지어 신을 믿어도 기반이 충분하지 않다. 종교는 경험이므로 당신은 신을 경험해야 한다. 당신은 단지 경험이 없을 때만 경험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러면 당신의 믿음은 그 경험이 진짜였음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목적, 즉 다음 실제 경험으로 당신을 데려가는 것이다. 믿음은 당신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돌아갈 때 그 어둠 속으로 가져갈 어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치료법은 매우 크고, 매우 완전하기도 하며, 매우 포괄적이다. 그리고 당신이 세상에 자비심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치유는 삶에서 반드시 일어나야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치유를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며, 육체적인 문제가 없고 감정 상태가 안정적이며 사람들 사이에 마찰이 없는 상태로 생각한다. 좀 터무니없게 들리지만, 실제로 당신이 삶에 대한 자신의 모델을 살펴보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편안해야 하는 삶인 이 상태와 매우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편안함은 사람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아니다. 분명히 세상에는 편안함이 거의 없다. 이런 지적 존재들에게는 더 편안한 세계가 있지만, 이 세계는 아니다. 이곳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은 종종 엄청나게 고립되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는 삶은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정신적·육체적 문제가 있고, 아픔과 고통이 있고, 망가지는 것들이 있다. 만약 당신이 몸을 제대로 먹이지도 돌보지도 않거나, 개인적 측면을 돌보지도 약간의 개인적 즐거움을 주지도 않으면, 이것들은 망가지며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들이 더 큰 것을 위한 매개체라는 것을 당신이 깨달으면, 많은 투자 없이도 이것들을 돌볼 수 있다. 몸의 90%를 쓰지 못한 채 임종을 앞두고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보다 삶에 신을 더 많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신은 당신의 매개체들이 완벽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의 매개체들은 임시방편이기 때문이다. 신은 당신이 아름답게 보여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아니다. 저승이 훨씬 더 좋다. 그래서 매우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희망을 포기하고 나면 떠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곳은 당신이 오고 싶어서 온 곳이며, 저마다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당신은 내면 깊은 곳에 비밀 화물처럼 당신 삶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만, 당신 마음으로는 그 목적을 알아낼 수 없다. 그것은 아이디어나 설명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재조정하고, 당신의 삶에 방향을 주고, 당신에게 자기 사랑을 회복하게 하는 심오한 경험이다. 당신 삶의 목적은 당신 내면에서 나오며, 우주와 당신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왜냐하면 그 목적이 우주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 목적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잘못된 가정을 하지 못하게 막으며, 삶과 재결합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경험을 통해 당신 앎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앎은 매우 강력하며, 미묘하지 않다. 사람들 대부분은 앎이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까 봐 두려워서 앎을 향해 작은 걸음조차 떼는 것을 두려워할 만큼 실제로 앎은 매우 강력하고 매우 현존한다.

신은 당신이 돌아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당신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 당신에게 팔다리가 하나씩만 있고 신이 있다면, 당신이 잘 해낼 수 있을 정도로 신은 매우 크고 매우 장엄하다. 그래서 우리가 치유를 말할 때, 우리는 단순히 매개체를 치료하는 것만 말하지 않는다. 그것에 관한 정보는 이미 많다. 문제가 순전히 물리적인 것이라면, 병원에 가서 치료하면 된다. 종종 그렇듯이 문제가 당신 마음에 있거나, 마음속에 그려진 것이라면, 당신은 누군가와 함께 다소 일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관계로 되돌아가고 자기 표현을 회복하고 자기 삶에 대한 어떤 관점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서 당신은 자신의 개인적 자아 너머에 있는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개인적 자아는 의식주 너머에 있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마치 육신에 어떤 것들이 필요한 것과 같다. 하지만 개인적 자아와 육신에 필요한 것들이 당신 삶은 아니다.

이 점에서 우리의 현존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우리는 저승의 당신 삶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당신이 우리와 관계를 맺으면,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이 헌신할 대상이 아니다. 단지 이승에서의 당신 삶이 훨씬 더 큰 것의 일부라는 것, 또 신은 단지 낭만적인 이상이나 저 위에 있는 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상기시켜 주는 존재일 뿐이다. 신은 모든 것이 결합으로 되돌아가도록 준비하고 있지만, 신의 방식대로 그것을 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점이 다행이다. 왜냐하면 결합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사회에 적용될 때 결국 매우 억압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앎을 발견하고 앎의 생각과 고요함을 경험하고 앎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배우기 시작할 때, 당신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치유하는 데 매우 다른 접근법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자신의 범위를 벗어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치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그것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다. 90%의 시간은 정원을 가꾸는 사람처럼 그냥 내버려둔다. 90%의 시간은 그냥 내버려둔다. 당신이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매우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시간은 10%이다. 그냥 내버려두라고 해서, 우리는 당신에게 그것을 방치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정원사는 정원을 결코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원사는 실제로 예측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결과를 도출하고 이끌어내는 더 큰 과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돕는 새로운 방식이다. 종종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그들은 자신의 기분이 좋아질 수 있도록 상대방이 좋아 보이기를 원한다. 주변에서 누가 울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매우 속상한 일이다. 당신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없으며, 그 사람을 돕지 않으면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앎은 다르다. 앎은 때를 기다렸다가 치료법을 준다. 나머지 시간에는 신처럼 앎도 잠자는 것처럼 보인다. 앎은 신처럼 그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이 신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신이 빠르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이 움직이면 모든 것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은 변한다. 그렇지만 신은 매 순간 활동한다.

앎은 90%의 시간은 조용히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세상의 기본 책임을 다할 때, 당신은 90%의 시간은 조용히 있을 수 있다. 앎이 어떤 것을 하라고 당신에게 지시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단지 당신 삶에서 분명한 의무를 이행하라. 그래서 당신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있다면, 그저 아픈 사람들만 돌보라. 일상의 일들을 하라. 가끔 앎이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면 그 일을 하라. 만약 앎이 90%의 시간 동안 조용하다면, 당신도 조용히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1%의 시간도 거의 조용히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은 90%의 시간 동안 조용히 있는 것이 매우 평화로운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상태는 지극히 주의를 기울이고 강력한 상태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왜냐하면 앎을 따르는 사람은 다른 삶을 살고 있고, 항상 에너지의 보고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매우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다. 이 행동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당신이 병원에서 일하면서 상처를 처치하든, 공장에서 일을 하든, 당신 앎이 다른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의 순간이 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바로 당신 앎이 다른 사람의 앎을 활성화했으며, 어떤 사람이 자기 내면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돌았다. 그것이 치유이다. 매개체를 치료하고 매개체가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을 넘어, 그것이 바로 진짜 치유이다.

어떤 것이 당신과 매우 깊이 접촉해야 하고, 당신 내면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할 정도로 당신 내적 삶에 불을 붙여야 한다. 하지만 그 점화는 시작에 불과하다. 준비도 있으며, 이제 당신의 준비는 매우 의식적이 된다. 그리고 불가사의한 것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앎을 준비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처방한 준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거나 더 나아지기 위한 처방조차 당신이 실제로 하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의 진정한 준비는 어떤 것을 더하기보다는 어떤 것을 치우는 것에 더 가깝다.

당신이 삶의 목적을 알고 싶다면 알게 되겠지만, 설명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큰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당신이 그 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실제로 어떤 것이 당신 삶에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일단 당신이 이 움직임의 힘을 알면, 이 힘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며, 이전에는 당신이 왜 여기에 준비되지 않았는지 알 것이다.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필요한 우리의 처방은 매우 간단하며, 복잡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결을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므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더 나아지는 데 필요한 이 모든 기술을 가지고 있지만, 이 기술로 인해 사람들의 문제는 점점 더 깊어진다. 예를 들어, 정부는 해결할 준비가 되지 않은 문제들을 연구하기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위원회가 모여서 수천 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물론 그들은 전문가를 고용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아무도 그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는다.

앎을 따르는 사람은 앎만을 찾는다. 만약 당신이 자신의 성격을 연구하는 데 너무 몰두하면, 하려는 시늉은 많겠지만 실제로 하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치 물속에서 첨벙대고 돌아다니지만, 실제로 건너편 해안까지는 가지 않는 것과 같다. 당신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렇게 첨벙거리며 분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로 샤워하다가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는 것은 신체에 매우 자극적이지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많지 않다.

앎은 매우 가까이에 있지만, 당신은 앎을 파악할 수 없다. 그렇지만 당신은 자신이 상황에 대해 무엇을 아는지 묻기 시작할 때, 앎을 이용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원하는 것을 자신이 아는 것과 구별해야 한다. 그러면 당신이 안다고 생각하거나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있다. 만약 이 모든 것을 지나칠 수 있다면, 당신은 바로 당신 자신의 핵심에 도달할 것이다. 무엇이든 아는 것, 심지어 바로 당신 앞에 있는 아주 간단한 것을 아는 것조차 모든 것이 매우 단순한 삶의 핵심으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신은 단순하다. 하지만 신에 대한 관념은 매우 복잡하다. 온갖 수준이 있고, 관점과 모양과 형태가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단순히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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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돌보기 위해, 적절하게 음식을 섭취하라. 당신의 건강을 해치는 음식이 있는지 알아보라. 반드시 운동을 하고, 조용한 시간을 갖거나 어떤 형태로든 명상을 연습하라. 99%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는 데 문제가 없다. 만약 당신에게 특별한 신체적 문제가 있다면, 당신은 그 문제를 보살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몸은 매개체이며, 때때로 그 매개체는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짜맞추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이 더는 이승에 있지 않고 이곳에서의 삶을 생각하지 않으면, 당신은 매개체를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자신이 이승에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생각할 것이다. 당신은 화물을 배달했는가, 아니면 하지 않았는가? 소포를 개봉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가? 우리는 당신이 좋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은 좋은 삶을 통해 자신의 화물을 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 몸과 마음의 건강이 항상 악화된 상태에 있다면,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 당신은 길가에 쓰러져서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당신이 삶에서 모든 것을 얻으려고 하지 않을 때, 상황은 훨씬 더 단순해지고, 당신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있다. 어쨌든 가진 것이 전혀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고, 가진 것이 많으면서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가진 것이 전혀 없는 비참한 사람이 있고, 마찬가지로 가진 것이 많으면서도 비참한 사람이 있다.

앎길에서 당신은 모든 것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목적은 당신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당신은 앎을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한다. 앎은 항상 이해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당신이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당신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이곳에 왔는데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병들고 당신 자신 안에서 꼼짝 못 하게 될 것이다.

개인적 측면에서 보면 당신에게는 건강한 자기표현과 건강한 관계가 필요하고, 다정함과 친밀함이 필요하며,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고, 당신은 앎이 드러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과정에 있어야 한다. 개인적 측면은 아이와 같다. 때때로 당신은 아이들이 터무니없는 것에 화가 났을 때, 그들에게 다른 할 일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 이것을 해봐!” 그러면 그들은 자신을 잊고, 그 일을 하며 눈물을 거둔다. “자, 다른 걸 해 봐.”

삶에서 중요한 일이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비극적인 곳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들은 모두 목적이 있어 이곳에 왔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당신은 자신의 매개체 너머를 보기 시작할 것이다. 매개체 너머를 본다는 것은 당신이 조용히 관찰하는 법, 자기 판단을 자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신 삶에는 틀림없이 신비가 있다는 뜻이다. 신비는 중요한 모든 것의 근원인, 당신 삶의 신비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파악하고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신비의 문은 열어 두라. 당신이 신비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고, 신비가 당신을 거부하지 않을 것임을 알면, 당신 삶은 시시각각 엄청난 발견이 될 것이다.

앎은 개인적 야망과는 매우 다르다. 앎과 함께하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며, 당신은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모른다. 만약 당신이 앎을 품고 있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의 앎을 활성화할 것이고, 그 과정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잘하면 알 것이다. 또 잘하면, 비록 당신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하는 이가 당신이 아니라는 것도 알 것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아주 큰 치료법을 제시한다. 이 치료법은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진정으로 투자하는 것이 필요하다. 만약 당신에게 신체적 문제가 있는데, 그것을 방치하고 예전에 살던 방식으로 다시 살아가면, 그 문제는 재발할 것이다. 당신이 편안하지 않다면, 분명히 육체적으로 그것을 느낄 것이고, 결국 그 문제를 멈추게 하려고 무언가를 할 것이다. 차를 들이받아 보거나, 지붕에서 떨어져 보라! 그러면 당신은 병원에 눕게 될 것이고, 이때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다룰 것이며, 이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이 극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그것은 상황을 알아내는 매우 급진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신에게 큰 치료법을 준다. 당신들 중에는 이 치료법을 사용하고도 왜 사용하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앎이 당신을 움직이므로 해야 하는 일이다. 앎이 당신을 움직일 때, 당신 삶에는 불가사의한 신비가 있고, 경이로움이 있다. 경이로움은 당신이 혼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느끼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경이로움을 느끼라.”고 하면, 당신은 “오늘 나는 경이로움을 느껴보려고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 경이로움을 추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느끼지 못한다.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하면,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보고 나서 “모든 것이 지루하고, 모든 것이 시시해!”라고 하며, 투덜거리고 사람들을 비웃으며 돌아다닐 수 있다. 사람들이 친절한데 자기 기분이 나쁘면, 가장 먼저 사람들 기분부터 나쁘게 한다. 그러면 행복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다. 적어도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만약 당신에게 팔다리가 하나씩 있고 눈과 귀도 하나씩만 있어 말도 안 되는 상태처럼 보여도, 당신은 여전히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람 중 한 명이 될 수 있다. 왜 그러는가? 왜냐하면 어떤 일이 당신 삶에서 일어나고 있고, 그것이 단지 당신 삶에서만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 당신은 이제 자아 성취를 하려고 그저 노력하는 한 개인이 아니다. 당신은 더 큰 존재이며, 당신의 영적 가족 전체이다. 당신의 삶은 종이에 닿는 펜촉과 같지만 당신 삶에 공급해 주는 것은 사실 잉크를 담는 그릇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자신이 하늘과 땅이 서로 닿는 곳임을 느낀다. 당신은 그런 경험을 자주 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당신이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육체적 매개체와 당신 마음의 개인적 측면을 만족시키려면,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좋다. 당신이 삶에서 어느 정도 고요해지고 싶다면, 어느 정도 단순함이 필요할 것이다. 단순하게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때 “내 삶에서 무엇이 필수적인가?”라고 묻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앎은 필수적인 것들을 다루므로 그 물음은 중요하다. 당신 삶에서 무엇이 필수적인가? 여기서 당신은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많고, 그것이 당신 삶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지 알기 시작할 것이다. 이것을 통해 당신은 “내 에너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에너지가 한없이 많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에게는 한계가 있다. 자신에게 무한한 에너지가 있고 초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은 멋지지만, 당신에게는 한계가 있으며, 양이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당신은 그 한정된 에너지로 무엇을 할 것인가?

만약 모든 사람에게 돈이 없는데, 우리가 모두에게 10달러를 주면서 “이것이 당신이 가진 전부다. 나가서 삶에서 어떤 것을 해보라.”라고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삶이란 그와 같다. 당신에게는 몇 년의 시간이 있으며, 깨어 있는 시간, 잠자는 시간이 있고, 엄청난 기회가 있다. 이것을 깨닫고 나면, 당신은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더 의식적으로 책정하기 시작한다.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 중요해지고, 아무 생각 없이 만나는 일이 줄어든다. 모든 일이 더 중요해지지만, 당신이 그것을 대하는 마음은 더 가볍다.

앎과 함께하면, 당신은 오류를 범하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개인 차원에서는 당신이 여전히 다소 엉뚱하겠지만, 이제는 개인 차원이 즐거움의 근원에 더 가깝다. 그리고 당신 몸도 여전히 약간 우스꽝스럽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몸은 당신이 아니다. 당신 차가 찌그러졌거나 진흙투성이더라도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가? 당신의 범퍼가 떨어져 나갔더라도 당신은 행복할 수 있는가? 당신은 범퍼를 땅에 질질 끌면서 고급 호텔까지 운전할 수 있는가? 장애인을 보고 고통을 느끼지 말라. 그들에게 앎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 삶 자체가 그들을 부양한다. 그들은 세상보다 더 크다.